열린예배찬양콘티(24050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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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영백 | 작성일 24/05/01 (17:08) | 조회수 276 |
금주(2024년 5월 5일)의 찬양콘티를 올립니다.
선하신 목자(D major)
선한 목자 되신 우리 주(D major)
예수 사랑하심을(D major)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D major)
사도신경
큰 영화로신 주(A major)
성경의 여러 인물 중에 요셉은 참 매력적인 사람입니다. 요셉은 17세에 이복형들의 손에 의해 애굽 나라에 종으로 팔려가서 13년 동안 혹독한 연단을 받고 난 후 30세가 된 어느 날, 하루아침에 애굽의 총리가 되어 110세에 죽기까지 최고의 영화를 누리면서 자신의 가족뿐만 아니라 애굽의 모든 백성들조차도 살리는 축복의 통로로 쓰임 받았습니다. 정말 영적으로 육적으로 최고의 성공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그의 드라마틱한 삶도, 그를 통하여 일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도, 우리에게 참 많은 것을 깨닫고 상상하고 사모하게 합니다. 특별히 우리는 요셉의 삶을 기록한 성경에서 중요한 단어를 발견합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꿈과 형통입니다. 요셉의 이야기는 그의 꿈 이야기로 시작해서 그 꿈이 이루어지는 과정과 그 과정 속에서 요셉이 누렸던 형통함 삶의 기록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먼저 요셉의 꿈을 살펴보면 그의 꿈은 우리가 생각하는 꿈과 사뭇 달랐습니다. 우리는 요셉을 꿈의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요셉은 어린 시절 자신이 꾼 꿈의 의미가 무엇인지 전혀 몰랐습니다. 그 당시 낯선 나라에 살고 있던 작은 씨족 사회의 12명의 아들 중에서 11번째인 철부지 요셉이 과연 당시 최강의 나라 애굽의 총리가 되는 것을 꿈으로 꿀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께서 그를 통하여 그의 가족과 애굽을 포함한 근동의 모든 사람의 생명을 구하려 하시는 하나님의 경륜에 자신이 주인공으로 발탁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요. 과연 그가 그런 꿈을 품을 수 있었을까요. 과연 그에게서 그런 인생의 그림이 나올 수 있었을까요. 성경에 보면 요셉의 생애 중 13년의 연단의 기간과 그 형제들을 다시 만나는 장면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셉은 그가 꾼 꿈을 잊고 있다가 이복형들을 다시 만나는 순간에 어릴 적 꾼 꿈을 기억해내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요셉은 자신이 품은 꿈이 있어서 그 어려운 고난과 연단의 시기를 견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요셉은 우리가 보통 생각하듯이 자신의 꿈 또는 비전이 있어서 어려운 자신의 환경이나 고난을 인내하며 자신의 꿈을 이룬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린시절 요셉이 꾼 꿈은 요셉이 스스로 품은 자신의 꿈이 아니었습니다.
한편 요셉은 억울하게 종이 되었지만 그는 형통한 사람이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17세의 어린 나이에 형들에 의하여 낯선 나라에 종으로 팔려 갔지만 그는 형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삶과 그가 손대는 모든 일에는 남다름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셉과 그가 하는 모든 일로 인하여 그가 섬기는 주인의 집까지 복을 주고 계심을 보디발이 알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당장의 그의 형편은 외국에서 팔려 온 종의 신세였지만 그는 형통한 사람이었습니다. 더욱이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죄수의 몸으로 옥에 갇혀있는 상황에서도 요셉은 형통한 사람이라고 성경은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요셉은 어떻게 그런 암담하고 어려운 연단의 시간을 형통한 사람으로 잘 이겨내고 하나님께서 예비해 두신 상상할 수 없는 축복의 자리, 그 꿈의 자리에 설 수 있었을까요?
요셉은 철저히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가 형들의 손에 의해 낯선 나라에 종으로 팔려 갔던 아픔과 상처도 결국 하나님의 섭리라고 고백합니다. 심지어 자신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운 보디발의 아내나 자신을 옥에 가둔 보디발 장군에게도 어떠한 보복을 한 기록이 없습니다. 자신을 아프게 한 그 사람들을 향하여 원망과 분노를 쏟아 내는 것이 아니라, 그를 통하여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께 집중하여, 섭리 중에 쓰임 받은 사람들에 대하여 시시비비를 하지 않은 것입니다. 사람의 눈이 없는 주인집의 은밀한 내실에서 그에게 다가온 치명적인 유혹도 하나님의 시선 앞에 서 있음을 잊지 않고 거절합니다. 사람의 눈만 피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잠시 누릴 쾌락에 빠져들지 않고, 내가 하는 모든 일과 행동은 사람의 기준이 아니라 언제나 하나님의 기준으로 판단 받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하나님의 시선을 의식하고 살아가는 것 입니다. 바로 앞에 서서 꿈 해몽을 하게 되었을 때도 자신을 나타내기보다 하나님을 앞세우는 겸손함을 잃지 않습니다. 이번에 꿈 해몽 잘하면 어쩌면 억울한 누명을 벗고 풀려 날 수도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그러니 자기를 좀 더 드러내어 인정받는 것이 아무래도 유리할 텐데 요셉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은 낮추고 하나님을 높여 드립니다. 이렇게 어려움에도 유혹 앞에도 스스로 높아질 수 있는 기회에도 힘과 권력을 쥐고 자신을 아프게 했던 사람들에게 앙갚음을 할 수 있을 때에도 철저히 하나님의 시선으로 문제를 보고 하나님을 높이고 인정하는 삶을 살았던 것 입니다. 그런 요셉에게 하나님은 최상의 인생을 살아갈 수 있도록 인도하셨습니다.
우리는 종종 꿈을 얘기합니다. 어떤 자리 어떤 위치에 오른다거나 어떤 직업을 갖고 싶다는 것을 꿈으로 얘기합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정말 하나님께서 디자인한 나의 최상의 삶인가요. 내가 무엇이 되고 싶다는 목표는 분명히 있어야 하겠지만, 그런 목표나 꿈 이전에 우리의 인생길에서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신뢰하며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섭리하심을 인정하고 사는 삶의 태도가 먼저가 아닌가 합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최상의 삶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최상의 삶으로 우리를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고자 하는 형통은 그가 하는 일이나 그가 걷는 그의 인생길에 그가 처한 상황이나 문제와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이 형통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그 어떤 문제나 상황에서도 결단코 망하거나 문제나 상황에 정복당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상황을 순간적으로 변화시키거나 그 문제를 당장 해결해 주시는 것이 형통이 아니라, 그 상황과 문제로 인하여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게 만드시고 그렇게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는 그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을 입증하고 보여 주시는 삶을 살아가도록 하는 것이 형통한 복을 받은 사람의 삶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그를 인정하시고 사랑하셔서 세밀히 그의 인생에 개입하시고 하나님의 기준과 방법으로 훈련시키시는 그런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형통한 사람이요 형통한 삶인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요셉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모든 사람이 요셉처럼 살 수는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의 이야기를 성경에 기록해 두신 것은 우리도 요셉의 삶의 태도를 본받으라는 것이 아닐까요. 요셉의 꾼 꿈이 아니라 요셉의 삶의 자세를 본받아 살면 우리도 요셉처럼 하나님께서 디자인한 최고의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교훈하시는 것은 아닐까요. 정말 요셉처럼 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