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밭게시판

한밭게시판
일제하 독립운동 진앙지로서의 미션스쿨의 가치
작성자 정승연 작성일 11/05/17 (13:50) 조회수 3084

일제하 독립운동 진앙지로서의 미션스쿨의 가치

일제하 민족교육의 명맥을 유지, 신사참배 문제로 대부분 폐교

2010년 8월 최근에 미국의 뉴스위크지가 세계에서 가장 좋은 나라들이란 기사를 내면서 한국을 15위로 꼽아 우리나라 국민들이 모두 놀라는 사건이 발생했다. 평가항목 중에 경제와 교육분야가 2등을 받아 경제와 교육이 한국의 강점으로 손꼽혔다. 언론을 통해서 오바마 대통령이 훌륭한 교육모델로 한국을 수차례 꼽았으나 아이러니하게 100여년 전의 한국의 근대교육은 미국 선교사들이 주도하여 설립한 사립학교(미션스쿨)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국권이 정지되자 애국의 열기는 두 가지로 분출되게 되는데 하나는 무장의병투쟁이고, 또 하나는 애국계몽운동이다. 일제의 압도걱인 군사력과 잔혹한 진압으로 국내의 무장의병투쟁은 1910년도에는 거의 소멸되었고 만주로 넘어가 무장독립투쟁으로 발전한다. 1905년 이후 계몽교육을 통해 국력을 확보하자는 의도로 각지에서 학교 설립이 이루어졌다. 1909년까지 설립된 학교는 5,727개였는데 현재 한국의 학교수가 11,000여개임을 감안한다면 100여년전에 설립된 5,727개의 학교 수는 대단한 교육열을 반영한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5,727개의 학교중 사립학교는 2,250개로 비인가학교 700개를 제외하면 전체 학교의 44.7%가 사립학교였다. 이중 1885년부터 1909년 사이에 기독교 선교사들과 기독교인들이 세운 미션스쿨은 664개로 전체 사립학교의 29.5%(한국교육사, p.230)를 차지하여 인구의 1%에 불과했던 기독교인들은 일반인에 비해 29배 이상 높은 사회참여활동을 나타내고 있었다.

 

조선총독부는 1908년 사립학교법을 만들어 애국계몽교육의 산실인 사립학교들을 규제하고자 교과서 검정제도등을 만들었으며, 재심사를 통해 한국인인 설립한 1,175개 학교의 인가를 취소하였다. 그러나, 일본이라도 당시 세계를 주름잡고 있던 영국과 미국의 선교사들이 세우고 관여된 미션스쿨들응 외교분쟁이 발생할 것을 우려하여 전부 재인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국제정세는 러시아의 극동진출을 막기 위해 일본의 역할을 영국이 지지하고 있었던 상황이었고, 일본 역시 국제무대에서 청나라, 러시아 등과의 외교전에서 영국과 미국의 지지에 기대고 있는 상황이었다. 또한 1910년 한일합방을 앞두고 국제무대의 주요 지지세력인 영국과 미국을 자극할 이유가 없었다). 이러한 국제환경으로 인해 한국내에서의 민족교육은 기독교계 미션스쿨을 통해서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이다. 1919년 3.1운동 발생후, 6월 30일자 투옥자 1,729명중 972명(56%)이 학생이었고, 276명(16%)이 교사였던 것에서 알 수 있다시피 사립학교들은 한일합방 이후에도 독립사상 형성과 독립운동의 진앙지 역활을 수행했던 것이다(한국교육사, p.269).

 

간도의 민족교육의 진원지였던 명동학교(청산리전투후 일제가 불태움)의 교목이었던 미국인 목사는 귀국시 재학생에게 태극기를 그려달라고 하면서 미국에서 조선의 독립을 위해 기도하고 노력하겠다고 할 정도로 조선인의 독립운동을 지지하였다(KTV 다큐방송). 선교사들은 일본의 외교 파트너인 영국과 미국에 일제의 잔학상을 폭로하기도 하였고, 조선에서 언론활동을 하기도 하며 보호자 역활을 하여, 단재 신채호 선생은 기독교 교회는 조선독립의 어머니(1926년)라고 하기도 하였다. 기독교인이 되어 교회를 돌며 교육활동을 하던 김구 선생은 상해에서 미국인 선교사의 도움으로 위험을 넘길 수 있었다(백범 기념관 자료). 연세대 설립자인 언더우드 선교사의 자손들은 2차 세계대전 때 한국에 침투할 OSS 대원으로 자원입대하였고, 한국 전쟁에 참전하기도 하였다. 조선에 들어온 기독교, 천주교, 일본 불교 3대 종교의 학교중 미션스쿨만이 민족교육에 힘을 기울였던 것은 매우 특이한 현상이다.

 

일제하 천주교와 불교의 학교정책

천주교는 조선독립에 무관심, 불교는 내선일체 식민불교로 이용

안중근 의사는 독실한 천주교신자로 지금 한국의 교인들은 학문에 어두워 교리를 전도하는 데 어려움이 적지 않습니다. 따라서 나라의 앞날은 말지 않아도 짐작할 만 합니다. 뮈텔 주교에게 말씀드려 서양 수사회에서 박학사 몇 분을 청하여 대학교를 세운 다음, 나라 안의 유능한 자제를 뽑아 교육시킨다면 몇십 년이 지나지 않아 반드시 큰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라고 조선 교구를 관장하던 뮈텔 주교를 찾아가 이야기 하니, 만일 한국인이 학문을 배우면 천주교를 믿는 데 소홀해 질 것이니 다시는 그런 말을 하지 마시오라고 거절당했다고 한다. 이 일 이후 마음속으로 교의 진리를 믿을 지언정, 외국인의 마음은 믿지 않겠다라고 맹세하였다고 한다(안응칠 역사, p.40).

1877년 일본 외무대신 무네노리는 조선에 대한 종교적 문화적 침투정책의 일환으로 진종 본원사의 승려 겐뇨에게 조선에 일본 불교를 전파시킬 것을 사주하였다: 메이지 정부가 유신의 대업을 완선한 뒤로부터 점차 중국과 조선을 향하여 발전을 도모함에 따라, 우리 본원사도 또한 훗카이도의 개척을 비롯하여 중국과 조선의 개교를 계획하였다. 메이지 10년(1877년) 내무대신 오오쿠보씨는 외무대신 테라지마씨와 함께 본원사 관장 엄여상인에게 조선 포교에 관한 일을 종용, 의뢰하였다. 이에 본원사는 곧바로 부산에 별원을 설치할 것을 명하였다. 1898년 대곡파 본원사의 승려 오쿠무라는 조선내 일본 불교의 포교방법으로 물질적 편의 제공, 일본 시찰을 통해 호감 조성, 학교를 설립하여 청년들을 계발하는 것을 제안하였는데, 일본은 조선에 스님양성학교를 포함하여 60여개의 학교를 설립하였다.

 

※ 불교인들은 기독교인을 ‘지옥에 갈 이교도’, ‘감소시켜야 할 대상’이라고 적의를 불태운다. 이 뿌리는 백여년전 일제하의 종교실상에서도 드러난다. 일본은 불교를 식민지 종교로 삼고자 정책적으로 육성하였고, 조선 민중의 독립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하였던 기독교는와 미션스쿨은 억제의 대상으로 삼았다.

 

※ 미션스쿨은 조선인 독립운동가를 배출하는 곳으로 역할하였으므로 일제 총독부는 한일합방후 사립학교법을 만들어 미션스쿨들을 법적으로 규제하고, 성경교육등을 금지시켰다. 이후 1919년 3.1운동에 충격을 받은 총독부는 유화책으로 미션스쿨에서 성경교육을 허용한다. 불교계가 요구하는 미션스쿨의 신앙교육 규제는 이미 일제때 선례가 있는 정책인 것이다. 일제가 한국 현대불교의 산모역활을 한 것에 비취어 볼 때 이상한 현상도 아니다. 한국 독립의 초석 역할을 한 미션스쿨을 법으로 규제하겠다는 교육감들이 불교계와 친밀한 현상은 유념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