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 예배의 목적은 ‘하나님을 체험’하게 하는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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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스마일뽀샘 | 작성일 08/01/07 (12:10) | 조회수 4687 |
최재하-사랑의교회목사
제가 알고 있는 유머가 하나 있습니다. 고추장과 된장이 결혼을 했답니다. 고추장은 여지이고 된장은 남자입니다. 첫날밤이 되었습니다. 왜 보통 남성들은 자기 아내에게 과거를 고백받고 싶어하는 못된 속성이 있지 않습니까. 된장씨도 그랬던 모양입니다. 된장이 여러가지 말로 고추장에게 과거를 고백하라고 설득하고 추궁도 합니다.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고 있던 고추장이 고백했습니다. "저는 사실 수입 고추장이에요". 고백을 끝낸 신부는, 이제 된장에게 고백하라고 다그쳤습니다. 그러자 된장이 뻔뻔스럽게 고백했답니다. "난 사실 똥이야."
오늘 제가 하고자 하는 강의는 다했습니다. 이 유머속에 열린예배에 대한 철학과 경고가 다 들어 있어요. 예배가 수입 고추장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냄새나는 똥이 되어서는 더더욱 안됩니다. 김만형 목사님이 "열린 예배는 스타일이나 폼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맞습니다. 열린예배는 스타일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입 고추장이 되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중국에서 고추장을 수입해왔다고 칩시다. 그 고추장은 중국사람들에게는 좋을 겁니다. 그런 한국사람에게는 그 수입 고추장이 썩 좋은 것이 아닙니다. 신토불이가 건강에 좋다고 하잖아요? 저는 열린예배를 드리기 시작하면서, 수입형 열린예배를 드리는 사람들 혹은 그렇게 드리려고 기획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는데, 그때마다 얼마나 놀라는지 모릅니다. 미국에 적합한 열린예배의 스타일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미국사람에게 적합하다고 해서 그것이 한국사람들의 영적 건강에도 좋은 것은 아니며, 예배의 흥과 맛을 돋구는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 먼저 고정관념 하나를 깨야 하는데, 열린예배는 스타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열린예배에는 꼭 드라마가 들어가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은데 그것은 대단히 잘못된 생각이에요. 드라마는 미국사람들이 가장 흥미를 가지고 즐기는 놀이문화일 뿐입니다. 열린예배가 스타일이라고 생각하니까 "작은 교회도 열린예배를 드릴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나오는 것입니다.
한국교회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외국교회에서 좋다고 하면 무조건 모방하려는 사대주의 근성입니다. 물론 좋은 것은 배워야지요. 그러나 똑같이 복사하는 것은 곤란해요. 한국교회는 기질상 너무 조급해서 사역이 발전하게 된 동기를 차분하게 파악하지 못합니다. 그들의 철학을 배우려고 하지를 않아요. 본지를 파악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한국에 토착화되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에 따라서 다양하게 일하실 수 있습니다. 성령이 임하실 때 어떤 사람은 쓰러 트릴 수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조용히 내리는 이슬비처럼 덮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역의 기본이 되는 정신이나 철학을 배우지 않고, 현상이나 결과만을 추구하다보니 오히려 사탄에게 휘둘리고 농락당하는 것이 아닙니까. 지금까지 한국교회의 문제점이 그것이었고, 열린 예배에 관해서도 예외가 아닙니다.
수입한 것보다 더 악한 것이 있어요. 겉으로는 된장같은 게 속을 들여다보면 똥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런 예배가 있을 수 있습니다. 겉으로 보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 같고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어지기도 합니다. 육안으로는 그렇게 보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눈으로 보면 전혀 그렇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예배인도자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경배하는 마음이 전혀 없는 경우가 있어요. 그런 예배 자리에 앉아 있으면 뭔가 성령께서 깊이 탄식하는 것을 느끼게 되죠.
열린예배는 그런 위험에 훨씬 많이 노출돼 있습니다. 열린예배에는 드라마, 찬양, 영상, 워싶댄스, 간증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그런데 특별히 문화예술이나 연예쪽에 재능을 가진 사람들은 자기노출증이 강하거든요. 그래서 결국 자신을 예배자로 드리지 못하고 자기 성취감이나 자기 만족을 위해 열린예배의 한 프로그램을 맡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런 동기로 만들어진 프로그램이 열린예배라는 이름으로 올려져 있다면 큰일입니다. 그야말로 똥처럼 악취를 낼 거에요. 여러분은 꼭 기억하셔야 합니다. 열린예배는 "예배"입니다. 쇼도 공연도 아니예요. 만약 쇼나 공연이라면 집회나 콘서트 혹은 모임이라는 말을 사용해야 합당할 것입니다.
열린예배를 드리기까지 여러분은 열린예배를 드리기 위해 배우려고 오셨습니다. 열린예배를 왜 만들려고 하십니까? 동기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저희 우물가선교회에 열린예배를 가르치시기에 앞서 먼저 영혼에 대한 눈물을 배우게 하셨습니다. 본래 우물가선교회는 유흥가의 호스티스나 사창가의 윤락여성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탄생된 사랑의 교회 소속 선교회입니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다 보니 그들의 낮은 자존감 때문에 속이 상했습니다. 저는 그들의 사기를 높여주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선택한 것이 연극이었습니다. 유흥가 사람들은 어느 정도 다 끼가 있었기 때문에 연극을 훌륭하게 만들어냈습니다. "창녀 마리아1" "창녀 마리아2" "십자가에 달린 창녀"등 연극은 대성황을 이루었고 어느 정도 목적도 이룰 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어떤 연극도 만들어낼 수 있는 인력과 노하우가 축적되었습니다.
그럴 즈음에 우리는 수서에 있는 윤락여성 보호소에 들어가서 매주 예배를 인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상처가 많았고 보통 사람들보다 복음을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 많은 장애물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교회나 정상인에 대해 마음을 닫고 있는 그들의 마음문을 여는 것은 수백 년 동안 닫혀 있던 성문을 여는 것만큼이나 힘들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좀더 효과적으로, 좀더 능력 있게 복음을 전할 것인가를 놓고 고민하다가 열린예배를 시도하게 된 것입니다. 물론 당시에는 그게 열린예배인지 뭔지 개념도 서 있지 않았고, 단지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하고 싶어서 연극을 예배 중간에 넣었던 것뿐이었습니다. 다음 글은 그 열린예배에 참석했던 한 평신도의 글인데 '목마르거든'(우물가선교회 회보)에서 인용했습니다.
어느 남편의 보고서
그날은 나의 생애 많은 날들 중에서 쉽게 잊혀질 수 없는 날이 되고 말았다. 하나님게서 얼마나 우물가의 여인들을 사랑하시는지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을 뿐만 아니라, 나 자신 또한 우물가의 여인일수밖에 없다는 충격을 맛보았기 때문이다. 그날 아침이었다. 우물가선교회 찬양팀 멤버인 아내가 한껏 애교를 부리면서 "정집사님! 오늘 우물가선교회에서 서울시립기술원으로 드라마집회를 가는데 차량이 부족하데요. 제가 그 먼 곳까지 걸어가는 것을 원하시지는 않겠지요?"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쾌히 응낙했다. .... 먼저 찬양팀이 찬양이 30분 정도 있었고 찬양이 끝나자 드라마가 시작되었다. 무대는 이중구조로 되어 있었는데 위쪽 무대에서는 한 여인이 등장했다.극이 시작되었다. 나는 구석에 앉아서 '지루하지 않은 집회는 되겠구나'하는 정도의 계산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의 계산은 완전히 빗나가고 말았다. 극이 절정에 이르러서는 나도 울음을 터뜨렸다. 주위를 둘러보니 자매들은 물론이고 연기를 하는 사람들이나 관객이나 모두가 펑펑 울고 있는게 아닌가? 놀라운 성령의 역사였다. 최재하 목사님이 나와서 10분간 메시지를 선포했고 그 다음에 구원 초청이 있었다. 나는 다시 한번 놀랐다. 170여명 중 85명이나 되는 자매들이 손을 들고 앞에 나와 결신을 했던 것이다. 그 집회를 통해 나는 소외되고 상처난 영혼들에게 더욱 은헤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큰 사랑과 그들의 영혼을 치료하는 데 쓰임받고 있는 우물가전도팀을 보았다. 지금 와서 고백하는 것이지만 우물가선교회 찬양팀 멤버인 아내가 무척이나 자랑스럽게 느껴졌었다.
만약 여러분이 영혼에 대한 사랑과 눈물 없이 열린예배를 계획하고 있다면 곤란합니다. 절대로 안됩니다. '어떻게 하면 영혼을 구원할까? 어떻게 하면 약하고 상한 영혼을 잘 섬길까?' 이 생각에서부터 출발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미시간 그랜드 래피즈에 있는 갈보리교회 담임 목사이고 '리더십' 저널의 편집고문이며, '크리스처니티투데이'의 상임편집자이자 저술가인 에드 답슨이라는 분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교인을 늘리기 위해, 무언가 변화가 필요하기 때문에, 교회에 어떤 변화를 주기 위해서, 교회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해서 열린예배를 시작하지 말라. 교회 안에 은사자들이 있고 그들을 세우기 위해, 교인들이 원한다고 해서, 교인들이 지금의 예배는 너무 지루하다고 해서, 새로운 예배를 시도해보는 것이 어떨까 해서, 단지 하고 싶다고 해서 열린예배를 시작해서는 안된다. 오직 우리 주님을 모르는 사람들을 향한 인격적이고 뜨거운 열정이 넘친다면 열린예배를 시작하라. 이런 열정이 아니라면, 또 있더라도 진짜 열정이 아니라면 열린예배는 실패할 것이다."
현장경험을 가진 사람으로서 매우 중용한 핵심을 지적한 것입니다.
열린예배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러면 열린예배가 목적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것이 목적입니다. 왜냐하면 예배의 형태는 문화나 시대에 따라 다양하게 옷을 바꿔입을 수 있지만 본질은 조금도 바뀔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열린예배는 '21세기형 예배갱신'일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배라는 것은 하나님과 예배자들이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입니다. 인격적으로 만나지 않으면 관계형성이 안됩니다. 인격적으로 만날 때에만 관계 형성이 되고 그 관계가 깊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예배 가운데 임재하십니다. 사람들은 그 예배 가운데 임재하신 하나님과 인격저으로 만나서 자기를 발견하고 자기를 드리게 됩니다.
그래서 성공적인 예배, 참된 예배를 드린 결과는 언제나 헌신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모세가 그렇고 이사야가 그렇습니다. 가시나무 떨기에서 모세가 하나님을 만났을 때 그는 자신을 주님 앞에 드리게 됩니다. 이사야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나를 위하여 갈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들어가게 되면 반드시 사람은 자기를 하나님께 드리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 크신 사랑 앞에 자진해서 굴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배드리러 와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지 못하고 밋밋하게 걸어나간다면 예배에 실패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데, 그 책임은 본인에게도 있겠지만 예배인도자에게도 있을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께서는 예배가 진행되는 것에 목적을 두는 것이 아니라 예배를 통해서 사람을 만나는 것에 목적을 둔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예배가 실패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데 실패하시지 않습니다. 누가 하나님의 임재를 막을 수 있겠습니까? 아무도 하나님의 임재를 막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만유의 주이신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시기
때문에 모든 곳에 임하실 수 있으며 만왕의 왕이기 때문에 어떤 존재도 그분을 가로막을 수 없습니다. 사탄도 가로막지 못합니다. 그러나 사탄이 예배를 가로막을 수는 있습니다. 예배자들을 가로막는 것입니다. 귀를 막고 눈을 가리고 마음을 열지 못하게 합니다. 성숙한 사람은 모든 장애물을 뛰어넘어서 예배 가운데로 깊숙이 들어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현존 앞에 무릎을 꿇지만 약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현존 앞에 나서기도 전에 장애물에 걸려 넘어지는 것입니다. 그릴파 제어는 예배에 대해 참 정확하게 말을 한 사람입니다. 그는 "예배란 하나님께는 존경을! 사람에게는 애정을!"이라고 말했어요.
열린예배의 목적은 수직적으로는 하나님에게 존경을 표하는 것이고, 수평적으로는 다른 예배자들에게 사랑을 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 특별히 연약한 지체들과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하는 지체들이 장애물을 극복하고 에배 가운데로 들어와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원래 예배의 신약적인 개념입니다. 교회는 한 몸이에요. 그러므로 나만 하나님께 예배드려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한 몸된 우리 모두가 함께 드려져야 하는 것입니다. 공동체가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이 열린예배의 목표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이런 예배에 실패했던 이유를 잘 분석해 보면 "하나님께는 영광을!" 여기서 끝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연약한 사람들이 마음을 열고 함께 들어와서 예배 공동체를 이루는 데는 사랑과 관심이 부족했습니다.
여러분, 저는 하나님 안에서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동등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밖에서는 휴머니즘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는 작은 자를 사랑하는 것을 하나님 자신을 사랑하는 것으로 인정합니다.
신앙의 핵심인 예배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구현되지 못한다면 어디에서 실천 되겠어요? 이런 측면에서 우리의 예배에 대한 정신이 좀 더 확대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과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예배 가운데서 분리되어서는 절대로 안된다는 뜻이죠. 사람을 사랑하고 존경할 때 주님의 영광도 한층 높아지게 될 것입니다.
어떻게 드려야 하는가?
그러면 열린예배 프로그램은 어떻게 만드는지 잠깐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나사로를 아시지요?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기 위해 그 무덤 앞에 서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무덤에 있는 돌을 치우게 한 후에 나사로를 부르셨습니다. 그러자 죽었던 나사로가 무덤에서 걸어나왔습니다. 그런데 나사로는 베로 동인 채로 나왔습니다. 주님은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베로 동여 맨 것을 다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이것을 열린예배 프로그램의 원리를 설명하는 비유로 채택하고 싶습니다. 불신자들은 죽은 나사로와 같습니다. 생명이 없습니다. 바위와 같은 장애물만 있습니다. 때문에 예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생명을 얻지 못합니다. 이 장애물을 제거하는 것이 바로 열린예배 프로그램이 고민하는 문제입니다.
또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생명을 얻기는 했지만 얼굴과 몸을 베로 동이고 무덤에서 나온 나사로처럼 부자유합니다. 그는 '베'라는 장애물 때문에 예수님의 얼굴을 마주 대할 수 없었습니다. 이 베 역시 자신의 힘으로 제거하기가 불가능한 장애물입니다. 누군가가 그 베를 풀어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과 나사로가 얼굴을 마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장애물을 제거하는 것 역시 열린예배가 고민하는 과제인 것입니다.
열린예배에 있어서 프로그램이란, 장애물을 제거하는 데 초점을 맞추는 작업니다. 그래서 청중분석을 잘해야 합니다. 불신자를 가로막고 있는 거대한 돌덩어리가 무엇인지,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을 가로막고 있는 베가 무엇인지, 그것을 발견해내고 그것을 제거하는 데 지혜를 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세상에 내보내시면서 비둘기처럼 순경하고 뱀처럼 지혜로우라고 말씁하셨습니다. 순경해야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지혜롭지 않으면 복음을 받아들여야 할 사람들의 마음을 열게 만들 수 없습니다.
저는 복싱선수 가운데 알리를 좋아합니다
알리가 사용하는 모토가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쏜다"입니다. 이것은 복음 전하는 데 좋은 전법입니다. 처음부터 직선적으로 복음을 전하게 되면 마음이 굳은 사람의 경우 완전히 마음을 닫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한번 사람이 마음을 닫게 되면 아무리 강력하게 복음이 전해져도 그 사람 마음속에 들어갈 수가 없게 됩니다. 복음을 전하면서 경험한 것인데 사람의 마음은 참으로 강퍅합니다.
때문에 사람의 마음을 열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반드시 죽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를 대속하기 위한 죽음이기도 하지만, 그분이 죽지 아니하고는 강퍅한 죄인들의 마음을 열 수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강압적으로 열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드셨고 지, 정, 의를 통해서 인격적으로 대하시기 때문이에요.
그러므로 사람들이 마음을 열고 예배 가운데로 나오도록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반드시 지혜를 동원해야 합니다. 물론 사람의 마음을 여는데 가장 주도적으로 일하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그러나 성령은 홀로 일하시지 않고 말씀과 함께 일하십니다. 예배에 있어서 프로그램은 성령께서 사람의 마음을 여는 데 사용하시는 방법이며 도구입니다.
열린예배로 오는 부흥
열린예배의 결과는 앞서 말씀드린 바, 헌신과 영적 전투에서의 승리와 지속적인 부흥입니다. 영적 전투에 대해서 좀 말씀드리겠습니다. 성공적인 예배를 드렸을 때 사탄의 권세로부터 자유로워지게 됩니다. 사탄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영혼이 구원받는 것이지만, 또 하나는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게 될 대 우리를 시험하고 우리를 공격하던 사탄의 세력이 떠나게 될 것입니다. 예배라는 것은 너무나 놀라운 능력을 담고 있습니다. 저는 여기서 잠깐 민수기 21장에 나오는 불뱀사건을 보고자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하나님께 원망하다가 불뱀에게 물리게 됩니다.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 모세가 하나님께 부르짖자 장대에 놋뱀을 매달라고 하나님께서 지시하셨습니다. 이 장대는 십자가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놋뱀은 붉은 샘으로, 예수님의 심판과 고난을 의미합니다.
요한복음 3장 14-15절에 보면 그 놋뱀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저는 이 본문에 대해서 의문을 가진 적이 있습니다. '왜 어린양이 아니라 뱀인가?' 뱀이라는 개념은 성경에서 자주 사탄을 상징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질문형태로 제게 대답해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진짜 심판 받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저는 그 질문을 받자마자 즉시 모든 것을 깨달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최종적으로 심판을 받은 것은 예수님이 아니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십자가는 죄와 사탄의 세력이 그 위에서 죽었음을 선언하는 통쾌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예수님은 3일만에 부활하셨어요. 죄와 사탄의 권세를 못받아 놓은 채로 말입니다. 예배의 중심 내용은 이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영적 전투의 승리소식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예배를 통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만왕의 왕이고 온 우주의 통치자이며, 심판자인 것을 온 땅에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미 죄의 세력과 사탄의 세력이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괴멸되었다는 것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선포할 때, 부활하신 주님의 "다 이루었다"라는 그 선언이 우리의 삶 곳곳에서 실제적으로 적용되어 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배를 통해서 능력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되면 내 속에 성령이 충만하게 되고, 그리하여 세상이 두렵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성령이 충만하면 사도행전1장8절에 있는 말씀처럼 담대히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성령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영이기 때문에 성령충만하면 그리스도를 말하고 싶어서 견딜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예배에 성공하는 교회는 저절로 부흥하게 되는 것입니다.
부흥이란 하나님께서 임하시고 죄가 드러나고 죄인들이 돌아오고 구원 받은 자들이 성경한 가운데 성령의 충만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부흥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참된 부흥은 예배를 통해서 왔습니다. 물론 그전에는 많은 기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흥은 예배를 통해서 온다는 것입니다. 또 예배를 통해 부흥은 지속되어집니다.
열린예배를 준비하는 이들
열린예배를 준비하는 살마들이 마음속에 꼭 새겨야 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프로그램에 지배당하는 예배를 만들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A.W 토저라는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오늘날 문제가 되는 것은 프로그램이 하나님의 임재를 대신하고 있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를 헌신의 가장 중요한 대상으로 삼는다면 프로그램은 하나님에 대한 공중예배의 질서를 고양시키는 고상한 도구가 될 것이다."
그는 프로그램이 하나님의 임재를 대신할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열린예배를 만드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임재를 프로그램으로 대치하려고 하는 실수들을 많이 합니다. 그리고 프로그램이 메시지를 대신한다는 생각을 가집니다. 그것은 대단히 위험한 생각입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 프로그램을 온전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생기를 불어넣으신 것처럼 프로그램 안에 생기를 불어 넣는 일입니다. 이 프로그램 안에 생기를 불어 넣는 일은 프로그램을 만드는 사람들이 성령에 사로잡혀야 가능합니다. 모세는 지팡이를 들고 능력을 행했습니다. 만약에 다른 사람이 그 지팡이를 사용했다면 나무 막대기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열린예배에서는 프로그램도 중요하지만 프로그램을 만드는 예배인도자들이 훨씬 중요합니다.
끝으로 채드윅의 말을 기억합시다. "성령은 방법 가운데 임하시지 않고 사람과 함께 하신다. 그분은 기계에 기름을 붓지 않으시고 사람에게 기름을 부으신다. 그분은 조직을 통해 일하시지 않고 사람을 통해 일하신다. 그분은 건물 안에 계시지 않고 사람 안에 거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