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밭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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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가는 길
작성자 정하득 작성일 06/10/21 (22:34) 조회수 3828

지난 추석 명절, 가족들과 함께 한 나절 달리는 고향 길은 멀기만 했다. 초등학교 2학년 손자 녀석이 승용차 안의 지루함을 견디다 못해 수수께끼를 하자며 내게 도전해 왔다. 아무리 머리를 짜내도 그 녀석이 들이대는 신세대 수수께끼 해답은 오리무중이다. 나이도 나이지마는 수수께끼에 도통한 녀석을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 얘야, 수수께끼 대결은 할아버지가 졌다. 이런 경우가 생기면 네가 어떻게 할까?  무척 궁금한데 … ”
말끝을 흐렸다. 녀석은 자신 있다며  이야기를 재촉 했다.  
“ 아빠, 엄마와 함께 보트를 타고 호수 한 가운데 까지 간신히 왔는데 무게를 견디지 못한 보트가 가라앉기 시작한 거야. 누군가 한 사람이 뛰어 내려야하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니? ”  
녀석은 내 이야기를 듣자마자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눈을 감고 아랫입술을 꼭  깨문 채 미간을 찌푸리며 몸살을 한다.
“ 얼른 대답 하지 않고 뭐 하는 거야, 어서 ! ”  재촉을 했다.
한참을 머뭇거리던 녀석은 무엇인가 결심한 듯 눈을 떴다. 방금 전 수수께끼 때처럼 의기양양한 모습은 볼 수 없다. 녀석의 눈빛은 그리움과 아쉬움에 가득 찬 채 혼자 중얼거린다.
‘  제가 물에 빠질 수밖에 …   ‘  
넌 센스 퀴즈로 던진 질문인데 그렇게 까지 심각할 줄 몰랐다.      
“ 오 ! 그건 아니 된다. 넌 아니 된다. 위급한 상황에서는 어린이가 최우선권이 있단다. 화재가 났거나 지진이 났을 때도 먼저 구조 되어야 할 사람은 어린이란다.”  
녀석의 몸살은 계속되었다. 아빠, 엄마 중 누구를 선택하여야 좋을지 고민하는 녀석을 보면서 괜한 짓을 했다는 안타까움 마저 들었다.
녀석 밑으로 유치원 다니는 남동생이 둘, 백일 지난 여동생,  총총 동생이 셋이니 엄마 아빠가 꼭 있어야 하기에 자기가 보트에서 뛰어내리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단다. 그런데 그것이 잘못되었다니 고심할 만도 하다. 녀석은 아빠 눈치를 살피는 가하면 막둥이를 안고 젖을 먹이는 엄마를 눈 여겨 보기도 했다.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결론을 내린 듯 귓속말로 내게 속삭였다.    
“ 할아버지 ! 엄마가 물에 빠지는 것이 옳아요 ”
예상하지 못 했던 판단을 듣고 더욱 놀랐다. 성질 급한 애비가 아이들 문제가 생길 때마다 형이 잘못이라며 꾸지람했고 내리 사랑인지 동생 편만 드는 것이 나도 서운 했는데 아빠를 들먹거리지 않고 엄마를 선택했다는 것이 더욱 궁금했다.
“ 할아버지, 엄마는 믿음이 좋아서 지금 죽어도 천국에 갈 수 있잖아요?  ”
아빠가 문제의 인물이니 기회를 주기 위해서란다. 아빠 엄마의 믿음을 저울질하는 녀석이 갑자기 두렵기만 했다.
언젠가 가정예배를 보면서 주님의 재림이 곧 임박 했다는 말씀에 녀석은 반론을 제기 했다.    “ 할아버지, 주님은 더 늦게 오실 것 같아요. 죄인이 너무 많아요. 그 많은 사람들을 다 지옥에 보낼 수는 없잖아요. 회개 할 때가지 기다리실 것이 분명해요.”
“ 사랑은 오래 참고 …  ” 란 말씀을 녀석은 이미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갈파한 것일까.
모태 신앙이란 칠순 경력을 앞 세워가며 가족들 보다 앞선 줄 착각했던 내 위선과 지식의 교만이 이렇게 녀석 앞에 쪽 팔리고 말 줄이야 !
분명 현대판 바리세인이 나였음을 뉘우치지 않을 수 없었다.
세상 풍파에 때 묻지 아니한 녀석은 말씀을 들을 때 마다 눈이 밝아져 사리가 분명한데 이처럼 녀석에게 칼질(?)을 당해야만 비로소 깨닫다니 한심한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 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마 18:3 ) 는 말씀을 새롭게 묵상해보는 고향 길은 줄곧 행복한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