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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 주께서 행하신 일<아버지 학교 후기>(2)
작성자 박희규 작성일 05/08/04 (21:39) 조회수 3397

72세에 아버지학교 후배가 되어주신 아버지                       --------------------------------------- <아버지학교 안산1기  김원> ============================================================================= 이 글은 월간 '아버지' 4월호에 실린 글로서 한 가정이 아버지학교를 통하여 주님 안에서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가를  생생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 1953년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린 저의 부모님은 일찍부터 신앙을 가졌지만 3남2녀인 자식들은 큰형님을 비롯한 형제 모두가 청력장애로 인해 가정에는 늘 어두운 그늘이 있었습니다. 막내였던 저는 따뜻한 대화와 웃음이 가득한 행복한 가정이 어린시절의 꿈이었습니다. 교육공무원이신 아버지께서는 남의 자식은 반듯하게 가르치셔서 교육계에서는 인정받으신 훌륭한 분이셨지만, 가정에 돌아오시면 장애 자녀들로 인해 사는 낙이 없었기에 우리 가족들에게 짜증과 성냄과 혈기로 가득한, 사랑이 없는 가정교육으로 수많은 상처와 함께 어머니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는 폭군이셨습니다. 그런 가운데 자연히 어두운 성격을 가지게 되어 사춘기 때는 싸움과 가출, 그리고 어머니에게 우울증과 함께 상처를 주는 아버지의 위선적인 모습에 분노한 적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두려움과 분노, 슬픔과 외로움, 열등의식 등으로 뭉친 건강치 못한 자아상을 갖게 된 저는 결혼적령기에 올 때까지도 나의 정체성에 의문을 품게 되었습니다. 오직 하나님께 의지하는 신앙으로 살아오신 어머니의 눈물겨운 기도가 그나마 저를 아슬아슬하게 살아가게 하였고 혼기가 찬 형, 누나들이 힘들게 결혼하면서 가정을 이루는 모습에서 저는 결혼이란 것이 불행의 시작이라는 잘못된 고정관념을 갖게 되었습니다. 사랑을 받지 못한 까닭에 사랑이 아닌, 아버지와 똑같은 방식으로 자녀들을 키우는 형과 누나들의 모습을 보고 저는 전율을 느낄 정도로 진저리 쳤습니다. 그리고 저도 결혼하면 그렇게 될 거라는 강박관념이 늘 제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기에 서른 살이 되도록 결혼에 대한 편견으로 무척 괴로워 하고, 결혼은 저와는 거리가 먼 것처럼 느끼면서 더욱 더 고독과 방황과 혼란 가운데 시간을 보냈습니다. 결혼과 가정, 그 두려웠던 낱말들 1993년, 교회 청년부의 신년기도회에 가서 전 하나님 앞에 절규에 가까운 기도를 하면서 주님 앞에 용서함을 받았을 때 나 같은 죄인을 용서해 주신 주님의 은혜에 그저 감사했습니다. 감옥에 가서 평생을 살지도 모를 저의 큰 죄를 용서해 주신 주님은 심판의 하나님에서 서서히 용서의 하나님으로 제 가슴에 와 닿게 되었습니다. 그때 저의 가슴은 두 번 다시 맛볼 수 없는 후련함을 느꼈습니다. 한 달 후 2월에 40일 새벽기도가 시작된다는 광고를 듣고 설레는 마음과 두려운 마음으로 기도작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과감한 용기를 내어 결혼을 위해 배우자를 만날 수 있도록, 구체적으로 9월 쉬는 토요일인 18일에 결혼식을 올릴 수 있도록 기도제목을 작정하고, 한 번이라도 새벽기도에 결석하게 되면 평생 결혼할 기회가 없는 것으로 각오를 했습니다. 내 평생의 첫 40일 새벽기도는 그렇게 시작되었고 어쩌다가 한 두번 늦게 일어나게 되면 지각을 하더라도 늘 앉는 자리에 앉아서 기도하며 40일 새벽기도를 무사히 끝냈습니다. 한달이 지난 후 다른 교회 목사님에게 자매를 소개 받게 되었고, 지금의 아내인 그 자매는 저와 나이가 8살이나 차이 나서 결혼에 대한 생각이 전혀 없는 그 자매를 오직 기도와 신앙적인 행복한 가정에 대한 책자를 서로 읽어가며 대화를 하면서 준비하다보니 40일 작정기도 한대로 9월18일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여러 가지로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양가가 영호남이라는 지역성, 동성동본이라는 이유로 구청의 혼인신고 반려, 장애가 있는 형제들에 대한 처가의 두려움 등 여러 장애물을 오직 신앙으로 극복하고 그렇게도 고대했던 가정을 가지게 되었을 때, 저는 그저 눈물의 감사뿐이었습니다. 결혼 전부터 준비한 행복한 가정에 대한 책자, 세미나, 신문 스크랩 등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가정을 이루고자 첫 자녀인 하영이가 네 살이 되어서야 TV를 마련할 만큼 노력했지만, 정작 이론만으로 준비해 온 가정에 대한 책자의 내용들이 머리 속에만 논리 비슷하게 정리되었을 뿐, 일상생활에서 실천 적용이 왜 그렇게 어려웠는지 차라리 몰랐으면 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부부싸움 할 때도 성경 말씀을 인용하면서 설득하려고만 했었고, 이혼하려고 몇 번이나 결심했다가 뒤집는, 그렇게 반복적인 삶이 공허하고 힘들 수가 없었습니다. 인생의 가장 큰 전환점을 만나다 제 나이 40 되던 2002년을 맞이하면서 정말 지금까지와는 다른 오직 주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니, 사랑의 주님이 서서히 저를 용서와 위로해 주심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사한 지 6개월 밖에 되지 않은 시흥에서 안산 동산교회 본당 근처로 곧 바로 이사하면서 심방오신 목사님께서 기도제목을 물으시길래 무심코 이 집이 가나안 땅이 되게 해달라고 말할 때 제 스스로 놀라면서 결혼 후 처음으로 다시 새벽기도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교사 양육학교와 베델성경공부, 제자반, 사역반 수료 등으로 교회 프로그램에 충실하고 부부 다락방 순장과 교구 새가족 순장을 맡아 신앙생활에 정진하던 중 2002년 9월 저에게 인생의 가장 큰 전환점을 안겨 준 아버지학교 안산 1기가 안산 동산교회에서 열리게 되어 기다렸다는 듯이 등록했습니다. 오직 가정에서 좋은 아버지가 되려고 일찍 간, 첫 날 찬양시간에 웬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는지… 그렇게 은혜로운 시간이 흘러 마지막 주 세족식 때는 제일 오랫동안 흐느끼는 저로 인해 진행이 지연되기도 했었습니다. 안산 1기 수료 후 곧바로 안산 2기 때 까지는 봉사한다는 개념이었고, 안산 3기에서 첫 조장을 맡아 불신자인 김광우 형제를 만나면서 영적전쟁이라는 것을 매순간마다 접하면서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꼈습니다. 오직 주님, 주님만을 수없이 속으로 외칠 뿐 더 이상 어찌 할 수 없었습니다. 1~2분을 참지 못하고 나가려는 김광우 형제를 주님은 저의 간절한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서서히 들어주셨습니다. 드디어 4주차에 주님을 영접하고 조 리더가 되었으며, 곧 바로 안산 4기, 국군아버지학교, 호주 시드니까지 열심히 스태프로 헌신하게 하심을 보면서 ‘나중된 자가 먼저 되겠구나’라는 생각과 함께 아버지학교 남성사역이 무엇인지 처음 맛보게 되었습니다. 안산 3기가 끝나고 며칠 후 문득 아버지가 생각이 나면서 다른 분들을 그렇게 아버지학교에 권유하면서 정작 저의 아버지께는 왜 권유하지 않는지 떠오르게 되었는데 제가 아직도 아버지를 진정으로 용서하지 않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기도한 후 일흔 둘이신 아버지께 찾아가서 아버지학교를 권유했을 때 아버지께서는 “첫째, 너를 낳기도 전에 교회를 다녔으니 더 이상 무엇을 권하냐. 둘째, 이 나이에 새벽기도 다니고 부부성가대에 봉사하니 강요하지 말라. 셋째, 저녁을 4~5시에 먹고 8시에 저녁 잠자리에 드는 것을 알고도 밤 11시에 끝나는 아버지학교를 왜 권유하냐. 넷째, 늙어서 1시간 반 이상은 의자에 앉아 있기가 힘드니 5시간이 넘는 아버지학교를 강요하지 말라. 다섯째, 무엇보다도 목사들은 다 고상한 척하는 속물들이니 더 이상 말을 꺼내지 말라.”며 거절하셨습니다. 한계를 느끼면서 일어나는 순간, 안산 3기 때 주님을 외치면 응답해 주셨던 하나님을 떠올리며 기도하니 부족한 저에게 지혜를 주셨습니다. 저는 뒤돌아서면서 “아버지께서 하신 말씀은 다 공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아버지학교를 권유하는 것은 제가 아버지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살아생전에 가장 귀한 선물을 드리고 싶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하고 나니 왜 그렇게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리는지... 눈물을 훔치면서 아버지 집에서 나왔습니다. 아버지학교에서 다시 만난 아버지 며칠 후 아버지께서 저를 찾으시고 “아버지학굔가 뭔가 하는 것이 언제 하냐”고 물으실 때 얼마나 가슴이 뭉클했는지... 그렇게 2003년 5월, 안산 4기에 참석하셨습니다. 전 그때 첫 관리팀장을 맡아 정신없이 준비하고 있는데 제 아버지의 조장을 맡으신 김희근 형제님께서 저를 찾으시더니 고개를 절래절래 흔드셨습니다. “김원 형제님만 아니면 저 오만한 자세로 일관하는 지원자 분을 집으로 보내고 싶다”고 말하실 때, 한 주만 기다려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아들의 소원을 들어 주려고 마지못해 참석하셨고, 나눔 시간에는 당신을 제외한 나머지 조원들끼리 나눔을 하라고 하시니 아버지 한 사람으로 인해 조원들의 마음을 열기 힘든 조장의 마음을 제가 어찌 모르겠습니까. 2주차도 어김없이 김희근 형제가 저에게 오셔서 도저히 안되겠다는 표정으로 아버지를 포기하고 보내시겠다고 하시기에 눈물로 간절하게 부탁을 드렸습니다. 한 주만 더 기다려 달라고, 지원자의 아들로서 제가 금식기도를 해서라도 마음을 바꾸시게 기도하겠다고… 그렇게 ‘나는 구경하러 왔으니 너희들끼리 나눔 시간을 가지라’는 오만한 자세로 일관하시던 아버지께서 3주차부터 조금씩 조금씩 무너져 감을 느끼며 더욱 기도드렸습니다. 드디어 사위, 며느리, 손자, 손녀들까지 모든 가족들에게 펜으로 정성껏 쓴 편지와 축복기도문을 코팅하여 제출하신 아버지가 저에겐 진정한 아버지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조 리더로 선출되시고 수료 후에는 곧 바로 안산5~11기, 여주 1~5기, 목회자 1~5기 등 2년 가까이 일흔넷 고령에도 불구하고 열정적으로 찬양팀에서 섬기시는 모습에 저는 그저 하나님께 감사할 뿐입니다. 아버지께서는 막내아들이지만 아버지학교에서는 선배님이라고 저를 소개합니다. 저는 행복할 뿐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습니다. 어머님 역시 감사할 뿐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남은 여생을 아버지학교에서 헌신하시는 저희 아버지를 위해 기도 부탁드립니다. 늘 주의 영광을 위해 섬김의 도를 다할 수 있도록 건강을 지켜 주십사하고 지난 시절의 어두움은 걷혔고 이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아버지와 함께 사역을 할 수 있음에 자랑스럽습니다. 또한 아버지학교 후속 프로그램인 가정회복사역자학교 과정을 통해 아버지와의 아물지 않은 상처를 바라보며 단지 머리 속으로만 아버지를 이해하는 것이 아닌, 진심으로 용서함을 통해 축복과 자유를 얻을 수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성장과정 중에 아버지에게서 받아야 할 것을 받지 못한 상실감과 받지 말아야 할 것을 받음으로 내 안에 처리되지 못한 적개심과 분노감이 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깨닫고 고통스러운 용서 과정을 통해 진정 아버지의 은혜가 무엇인지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와 연관해 발생한 정신적 충격들이 나의 인격과 성격에 어떤 영향을 미치며, 여기서 파생되는 두려움과 수치심이 나에게 어떤 죄책감과 죄의식을 갖게 하는지 깨닫게 해 주었습니다. 자아 정체성을 회복하면서 유교문화의 역기능적인 가정에서 자라난 분노중독자에서 진정한 아버지의 역할을 깨닫는 자가 되었습니다. 저는 이제 더 이상 슬퍼하지 않고 내 안에 사랑이 가득한 하나님의 진정한 자녀로 거듭나게 해주신 아버지학교를 사랑하며, 이 땅의 많은 아버지들이 아버지학교를 통해 주님이 허락하신 작은 천국을 마음껏 누릴 수 있다면 어디든지 작은 도구로 조용히 섬기렵니다. 주님, 제가 진정한 아들입니다. 주님, 제가 사랑의 남편입니다. 주님, 제가 용서의 아버지입니다. <P.S> 김원 형제는 안산 동산교회를 섬기며 주님이 허락하신 가족인 사랑하는 아내와 딸 하영이(초5)와 아들 주영이(초1)와 함께 행복한 나날들 속에 하나님 아버지와 동행하는 기쁨을 누리고 있습니다. 부친인 김종대 옹 역시 아버지학교를 수료한 동문으로, 부자가 함께 아버지학교 스태프로 아름답게 섬기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