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 주께서 행하신 일<아버지학교 후기>(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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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희규 | 작성일 05/08/09 (09:20) | 조회수 3035 |
돈벼락에 정신잃은 아버지, 가정으로 돌아오다 ------------------------------------------------------<아버지학교 평촌 1기 장상태> ============================================================================= 이 글은 월간 '아버지' 2004년 8월호에 실린 글로서 한 사람의 인생이 아버지학교를 통하여 주님 안에서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가를 생생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 저는 경상도 두메산골에서 자랐습니다. 너무나 가난했습니다. 먹을 것이 없을 정도로 가난했습니다. 오남매의 장남인 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대를 지원하여 갔습니다. 제대 후에도 공부를 무척 하고 싶었으나 돈이 없어 공부를 할 수 없었습니다. 80년 봄 무작정 차비만 가지고 서울로 올라갔습니다. 어렵게 호텔에 취직을 하였습니다. 레스토랑에서 웨이터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서울은 넓었지만 내가 몸을 의지할 곳은 없었습니다. 한번은 잘 곳이 없어 회사 친구 집에서 하룻밤 잠을 자기로 부탁하였습니다. 마침 그날이 그 친구가 쉬는 날이라 제가 근무를 마치고 만나서 친구가 살고 있는 집으로 가기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 친구는 만나기로 한 다리 이쪽 끝에서 기다렸고, 저는 다리를 건너가 저쪽 끝에서 기다렸습니다. 밤이 깊어 갔지만 저희는 서로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슬펐습니다. 무작정 주민등록증을 들고 경상도 여인숙이라 쓰인 간판을 보고 들어갔습니다. “저는 경상도 사람이고 워커힐에 근무하는데 오늘은 돈이 없습니다. 하룻밤 재워 주시면 내일 돈을 갚아 드리겠습니다.” 애원하였습니다. 여인숙 주인의 허락으로 겨우 잠을 잘 수가 있었습니다. 아침에 출근을 하려고 일어나 주머니를 뒤지니 버스비조차 없었습니다. 걸었습니다. 아침에 출근하는 차들이 쌩쌩 달렸습니다. 자가용들도 너무나 많았습니다. 천호대교 다리를 건너며 많이 울었습니다. 지금도 그때 생각만 하면 눈물이 하염없이 흐릅니다. 세상이 참 불공평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벼락 부자가 된 사나이의 불행 돈을 벌어야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열심히 저축하고 돈을 모았습니다. 그리고 84년 지금의 아내와 결혼도 하였습니다. 열심히 돈을 저축하여 제법 큰 돈을 모았습니다. 그리고 86년에 제가 가지고 있던 전 재산을 아내 몰래 증권에 투자하였습니다. 은행주 한 곳에 모두 쏟아 부었습니다. 한 은행 8,800주를 샀습니다. 사실 저는 그때 주식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상태였습니다. 제가 주식을 사고 난 뒤 우리나라 주식이 뛰기 시작하였습니다. 날마다 상종가를 쳤습니다. 매일 200~300만원씩 돈이 증가 하였습니다. 주식이 배가 되고 또 배가 되자 증권회사 직원들이 팔자고 난리였습니다. 그런데 저는 주식을 모르니, 왜 파느냐고 거절하였습니다. 그냥 두면 올라가는데 왜 팔라고 하는지 이해가 안되었습니다. 주식은 계속 올라갔고 몇 억이 넘었습니다. 땅도 사 보았습니다. 적은 돈을 투자한 땅이 2억원 가까이 올라갔습니다. 87~88년 일이니까 제법 큰 돈이었습니다.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었습니다. 그때 당시 서울에 아파트를 샀으면 여러 채를 샀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돈, 돈’ 하니까 ‘그래, 너 돈 맛 좀 봐라’하고 부어주신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돈이 생기자 그토록 하고 싶었던 공부는 생각도 나지 않았습니다. 마냥 돈을 더 벌 궁리만 하였습니다. 그리고 세상의 쾌락을 탐닉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체면 때문에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마시고 다녔고 포카, 빠찡꼬, 여자, 온갖 나쁜 것만 골라 하고 다녔습니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죄인 줄 몰랐습니다. 남자라면 당연히 해야 하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세상의 문화 즉 술, 도박, 오락, 여자를 즐길 줄 모르는 남자들은 바보인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비웃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아내에게는 늘 큰소리를 치고 살았습니다. 똑바로 살라고 했습니다. 여자가 하는 것이 무엇이 있냐고 다그쳤습니다. 심한 언어 폭력으로 아내를 괴롭혔습니다. 아내의 부족한 면을 사랑으로 감싸는 것이 아니라 더욱 자극을 가하여 내가 원하는 데로 바로 잡으려고 안간힘을 다하였습니다. 참으로 어리석었습니다. 아내가 동생 4명을 교대로 데리고 있으며 밥지어주고 빨래해주고 용돈까지 주며 대학을 보냈건만 나는 고맙다는 말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장남이니까 당연히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돈만 벌어다 주면 남편이고, 아버지고 모든 역할을 다 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밖에서 친구들과 모임 있고 나면 반드시 2차는 저희집이었습니다. 아내의 의사는 늘 무시 되었고 내가 하고 싶은 데로 하고 살았습니다. 그것이 남자다운 남자인줄 알았습니다. 이것이 죄인줄 아버지학교에서 알았습니다. 돈이 떠난 자리에 남은 것들 저는 죄인이었습니다. 아주 나쁜 죄인이었습니다. 지금은 동생들이 모두 분가하여 치과 의사로, 사업가로 모두 성공을 하였지만, 저의 아내는 병이 들고 말았습니다. 간이 나빠 계속 병원에 입원을 하였습니다. 저는 인생에 전반전에 이렇게 바보처럼 살았습니다. 제가 이렇게 바보처럼 살자 저를 사랑하시는 주님은 저를 그냥 버려두지 아니하셨습니다. 함부로 생각하는 돈을 주님이 취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돈을 빌려주기 시작하였고, 빌려주면 아무도 갚지 못했습니다. 몇 백만원, 몇 천만원, 몇 억원씩 빌려간 사람이 모두 망했습니다. 돈 달라는 소리도 못했습니다. 그렇게 떼이면서 왜 빌려주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빌려준 돈 때문에 소송도 한번 하지 못했습니다. 아내가 위로 했습니다. 쉽게 번 돈, 그건 당신 돈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이 가져가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위로가 되었습니다. 그 때 비로소 교회에 나가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첫 예배를 드리고 나오는데 어찌나 기분이 상쾌하게 느껴지던지, 마치 비온 뒤에 맑게 개인 하늘을 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 전에는 참으로 많은 친구들이 저에게 전도를 하려고 하였지만 저의 대답은 언제나 하나였습니다. ‘너나 잘 믿고, 잘 먹고 잘 살아라’ 이것이 제 대답의 전부였습니다. 참으로 교만 하였습니다. 진정한 바보는 저였습니다. 그러던 중 저는 30대 중반에 대학 입학시험을 치루고 경희대 호텔경영대학에 입학하였습니다. 열심히 공부하였습니다. 제가 그토록 하고 싶었던 공부였습니다. 항상 장학금을 받았고 공부가 재미있었습니다. 대학원에 입학하였습니다. 공부하는 것이 하나님이 저를 위해 예비하신 것 같았습니다. 좋은 사람들을 만나게 하셨고, 석사 2학기를 마치자 학교에서 교수로 오라는 제의가 들어왔습니다. 박사가 되어도 들어가기 어려운 것이 대학교수 자리인데 석사도 마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저를 위해 예비하셨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충격의 아버지학교, 박사 학위도 뒷전 대학으로 직장을 옮기자마자 바로 아버지학교를 만났습니다. 호텔에 지배인으로 있을 때는 토요일에 열리는 아버지학교에 참석한다는 것은 불가능 하였습니다. 아내의 강요와 교회 집사님들의 강권으로 아버지학교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98년 봄이었습니다. 충격이었습니다. 아버지학교라는 거울로 나를 들여다보았습니다. 부끄러웠습니다. 너무나 부끄러운 아버지가 거기 있었습니다. 많이 울었습니다. 회개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숙제로 쓴 편지에서 아내와 자녀들에게 용서를 구했습니다. 그리고 사랑을 고백하였습니다. 그리고 아버지학교 스텝으로 나섰습니다. 저는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몇 년 전 박사학위를 받을 때에도 아버지학교 스텝을 쉬지 않았습니다. 학위 받는 것을 6개월 미루어 가며 스텝으로 섬겼습니다. 저는 박사보다 아버지학교가 더 중요하다고 믿고 있습니다. 관리팀으로, 조장팀으로 때로는 진행자로 이제는 강사로도 섬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국내는 물론이고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면 해외도 마다 않고 다녔습니다. 샌프란시스코, 시애틀, 자카르타, 시드니, 파리, 프랑크푸르트… 아버지학교가 있는 곳이면 달려갑니다. 섬기러 가지만 섬기는 것보다 제가 받는 은혜가 훨씬 더 크기 때문에 아버지학교에서 봉사하고 있습니다. 아버지학교를 만나지 못하였더라면 제 인생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하기도 싫습니다. 이제는 아내도 저를 조금씩 인정해 주는 것 같습니다. 아이들과도 더욱더 가까워졌습니다. 이 땅의 모든 아버지들이 저와 같이 바보 같은 삶을 되풀이 하지 않을 때까지 어둡고 황량한 이 땅이 고쳐질 때까지 아버지학교를 섬기겠습니다. 이제 인생의 후반전에 가치와 의미를 추구하며 살아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