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밭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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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나를 죽이시오
작성자 임영택 작성일 05/03/09 (10:17) 조회수 3405

사랑하는 한밭제일교회성도님!! 옷깃을 스치는 봄바람이 상쾌합니다. 아파트 뜨락에 있는 목련꽃 봉우리가 제법 커져 가고 있네요. 지난 겨울은 지진해일...등으로 우리들의 마음을 아프게 한 일들이 많았지만...아버지께서는 어김없이 봄이라는 선물을...우리에게 생동감을 다시 주시는 것 같습니다. 아래 글은 월간잡지 "아버지" 금년 3월호에 실린 글인데 작년 11월에 개설한 대전 12기 아버지학교 수료하신 한 형제님의 이야기입니다. 사랑하는 한밭제일교회 성도님들!! 항상 즐겁고 행복한 일들이 많으시길 기도드립니다. 우리들을 만나는 사람들은 미래가 밝아 질 게예요. 왜냐하면 우리들은 축복의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12교구  2구역 임영택집사 드림  (016-213-1224) ============================ 상처 입은 아들의 영혼과 화해하다      저는 대전 아버지학교 12기에 입학하여 첫째 주와 둘째 주 모임을 거치면서 2주 동안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첫사랑과 사람을 향한 뜨거운 사랑을 다시 찾아야 하고, 그래서 흐트러진 영적 질서를 다시 회복해야 한다는 긴박감으로 2주간을 보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저도 모르게 바리새인과 같은 율법적인 신앙인으로 변해가고 있던 저의 영성이 아버지학교를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났습니다. 다섯째 주, 세족식이 베풀어지던 날 밤에 한 형제의 간증을 듣고 저는 큰 도전을 받았습니다. 그 간증을 들으면서 가슴살을 칼로 쪼아내는 듯한 아픔으로 몸서리쳤습니다. 아버지학교 셋째 주 집회에서도 22살 큰아들이 저 때문에 거의 10년 동안 받았을 상처를 생각하면서 가슴 아픈 회개의 눈물을 흘렸지만, 그날 밤 저는 아들이 받았을 상처를 생각하니 기가 막힐 것 같았습니다. ‘이 못난 아비한테서 받은 상처가 손자대로 대물림된다면 나는 어떤 사람이 되는가?’하는 생각이 드니 저는 눈앞이 캄캄해졌습니다. 아들의 심령 속에 남아 있을 상처들을 하루 속히 치유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다급한 생각에 목이 타는 듯했습니다. 아들이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가끔 혹독하게 다루고 난 다음에는 아들을 꼭 껴안고 하나님께 뼈아픈 기도를 드리곤 했지만, 그 때는 아들의 마음 속 깊은 데를 들여다보지 못한 채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고 아들과 일방적인 화해를 하는 것으로 끝나버리곤 했습니다. 한편으론 “네가 잘못했으니 그 같은 체벌을 받은 것이고 나는 아버지로서 너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고자 한 것이다”하면서 저는 아들에 대한 체벌을 당연히 여기고 합리화해 버리곤 했습니다. 그러나 그날 밤 저는 비로소 아들의 깊은 마음을 들여다보았습니다. 매질과 억압으로 다스린 큰아들 거의 10년 동안 아들과의 사이에서 일어난 일들을 일일이 말하기는 시간이 짧습니다. 저희 부부는 아들이 초등학교 4학년 때 게임에 빠져 큰 돈을 훔치는 나쁜 습관 때문에 거의 일년 동안 큰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아들을 하나님의 인내와 지혜로 다스리지 못하고 감정이 앞선 나머지 아들에게 너무도 큰 상처를 주었습니다. 종아리를 구렁이가 감는 것처럼 회초리로 때리기도 하고, 그런 일이 있은 지 며칠도 안 되어 또 그 손버릇이 재발되는 바람에 저는 분노한 나머지 부엌에서 칼과 도마를 가지고 와서 또 한번 이런 일이 생기면 그때는 손목을 잘라버리겠다고 엄포를 놓았습니다. 그해 겨울날엔가 또 그 손버릇이 발각되자 저는 더 이상 아들을 때리고 싶지 않아 아들의 옷을 다 벗겨 집에서 쫓아냈고, 아들은 한 시간 동안을 아파트 쓰레기통 옆에 숨어 추위에 떨었습니다. 저는 아들을 찾아내서 끌어안고 엉엉 울었습니다. 저희 부부는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저희들은 저희 가정에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저희들이 하나님 앞에서 뭔가 잘못한 것이 있는가 생각해 보아도 도무지 찾아낼 수가 없었습니다. 제 신앙 여정 속에서 그 때 만큼 하나님을 열렬히 사랑한 적이 없었는데, 왜 그러한 일이 일어나는지 의아스러울 뿐이었습니다. 간혹 가정 예배를 드리고, 교회에 열성적으로 봉사하고, 친족들과 신앙 때문에 부딪치는 것 말고는 잘못한 것이 없고, 직장에서는 성실한 직원으로 인정받고 있는데 저희들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는 이유를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또 한번의 엄청난 죄악을 저지르고야 말았습니다. 어느 날 아침에 제 방에서 출근 준비를 하고 있는데, 아내가 학교에 가려고 현관문을 나서는 아들한테 나지막한 소리로 “아빠한테 말하지 않았는데,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말거라.”저는 그 순간 머리가 삥 도는 것처럼 아찔했습니다. ‘이런 짐승 같은…그렇게 혹독한 체벌을 받은 지가 언젠데…’ 저는 방안에서 튕겨 나오듯이 뛰어나와 현관문을 나서는 아들의 손목을 붙잡았습니다. 아들을 응접실 바닥에 내동댕이쳤습니다. 기다란 우산대로 아들을 개 패듯 두들겨 팼습니다. 아내는 아들을 보호하려고 껴안은 채 “차라리 나를 죽이시오.”하고 절규하면서 아들과 함께 응접실 바닥을 뒹굴었습니다. 얼마 동안 아들을 두들겨 팼는지 모릅니다. 제가 휘두르는 우산대를 손으로 막으려던 아내가 손을 다쳐 지르는 비명에 저는 정신을 차렸습니다. 저는 아들을 자기 방안에 밀쳐 넣은 뒤 요강과 물통 하나를 아들 방에 넣어주고 방문을 대못으로 박아 놓고 출근했습니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도저히 견딜 수 없어 오전에 조퇴하여 귀가하였습니다. 아들을 끌어안은 채 칼로 가슴을 도려내는 듯한 회개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 일로 아들의 돈 훔치는 버릇은 뿌리가 뽑혔습니다. 그러나 저는 아들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내고야 말았습니다. 어린시절 큰형에게 받은 고통의 대물림 아들에 대한 불신과 불만이 그때부터 시작되었던 것 같습니다. 아들은 책벌레였지만, 주위가 무척 산만하였습니다. 제 맘에 안 드는 아들의 기질과 생활습관 때문에 저는 참을성에 한계를 드러내곤 했습니다. 어떤 때는 분노하여 아들에게 상처를 주는 말까지 내뱉곤 했습니다. 교회에서는 본이 되는 훌륭한 신앙인에다가 직장에서는 인정받는 모범 직원이 말입니다. 그때는 잘 몰랐습니다만, 저는 제 큰형님에 대하여 무의식 속에 쌓였던 분노를 제 큰아들에게 표출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저보다 20살 위인 큰형님 내외분이 어머니와 갈등을 일으키다가 마침내 살림의 절반 이상을 떼내어 분가하시게 되고, 그 후로 동생들을 돌아보지 않고, 술만 마시면 어머니의 가슴을 아프게 하셨습니다. 그 후로 가세가 기울고 집안에는 우환이 끊일 줄 몰랐습니다. 저는 그 모든 불행의 원인이 큰형님에게 있다고 생각하면서 큰형님을 원망하고 증오했었습니다. 그러한 과거의 기억들로 저는 집안의 장남이 잘못 되면 집안이 망하게 된다는 생각을 무의식 속에 가지고 있었던 듯 합니다. 그래서였는지는 몰라도 제 큰아들의 잘못된 버릇과 산만한 기질이 아들 자신의 장래와 저희 가정을 망가뜨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저의 마음 깊은 곳에 숨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들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용납하지 못하고 아들에게 지나치게 엄격했던 것 같습니다. 큰아들이 고등학교 3학년 때도 큰 사건이 터졌습니다. 아들이 새벽 2, 3시까지 인터넷 채팅하는 것을 저는 두세 번 발견하고 엄하게 훈계와 경고를 했는데도, 수능시험을 석 달 앞둔 8월 어느 날 새벽에 화장실에 가던 저는 또 그 현장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분노를 못 참고 아들을 폭력으로 다스렸습니다. 아내는 아들을 보호하려고 아들을 껴안은 채 응접실 바닥을 뒹굴었습니다. 지금부터 2년 전, 큰아들이 대학교 1학년 때의 일이었습니다. 그날도 큰아들은 저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아 저의 분노를 폭발시켰습니다. 예전에도 몇 번인가 그런 일이 있어 저는 아들을 나무란 적이 있었습니다. 그날 저녁에 저희 부부는 무슨 일로 외출했다가 밤늦게 들어갈 일이 생겨 큰아들에게 핸드폰을 쳤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인 막내 동생이 늦은 밤에 혼자 집에 있으니 일찍 귀가하여 동생과 함께 저녁밥을 먹고 기다리라고 부탁하였고, 큰아들은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저희 부부가 3시간 후인 밤 10시를 넘어 귀가했을 때 아들은 집에 없었습니다. 핸드폰을 치니 아파트 인근의 책 나눔터에 있다고 했습니다. 저는 분노를 참지 못했습니다. 아들이 집에 들어서자마자 저는 아버지의 말을 가볍게 여기는 아들이 어떻게 성공적인 인생을 살 수 있겠느냐며, 질책을 넘어 분노가 폭발했습니다. 이번 만큼은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면서 저는 아들을 방안에 몰아넣고 무참히 짓밟았습니다.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 거라고 다짐하라며 저는 의자를 들어 아들을 내리칠 듯이 위협했습니다. 아들은 저의 행동에 기겁하면서 벌벌 떨다가 경기를 했습니다. 눈이 뒤집어지는 듯 했습니다. 아내는 차라리 자기를 죽이라면서 저에게 달려들었습니다. 저는 갑자기 경기하는 아들이 어떻게 될까 봐 덜컥 겁이 났습니다. 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아들을 끌어안고 흔들고 달랬습니다. “000, 이 못난 아비가 잘못했다”“내가 잘못했다.”한참 만에 아들은 식은땀을 흘리며 깨어났습니다. 가슴을 찢으며 아들에게 용서를 구하다 한 달 후 아들은 신검을 받게 되었고 시력이 약해 공익근무요원으로 떨어졌고, 2주 후 어느 주말에 경기도에 사는 어떤 선배를 만나고 온다며 집을 나갔습니다. 이틀 후에 집으로 돌아와서는 경기도 안산의 어느 방위산업체에 취직했다면서 거기서 공익근무 요원으로 군 복무를 하겠다며 대전을 훌쩍 떠났습니다. 아들은 그 후 3개월 동안 집에 오질 않았고, 엄마인 아내한테는 전화하면서도 아버지인 저한테는 전화 한 번 해오지 않았습니다. 그 후 2년 동안 아들은 한 달에 한 번 정도 집에 왔습니다. 저는 부부행복학교와 가정사역활동을 하면서 많은 깨우침을 받았고, 아들과의 관계 회복을 위해 노력해 왔었습니다. 아들을 자주 껴안아주고, 아들의 이마에 손을 대고 축복기도를 해주곤 했습니다. 그러나 아들과 깊은 화해를 하진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이번에 아버지학교를 통해 저는 아들의 마음 속 깊은 상처를 발견하게 되었고, 그 상처를 생각하며 가슴 아픈 회개의 눈물을 흘리고 아들의 상처가 치유되길 진심으로 하나님께 간구하게 되었습니다. 언젠가 퇴근하면서 아들에게 핸드폰으로 전화했습니다. “내가 아버지학교에 나가고 있다. 너에게 더 좋은 아버지가 되고 싶어 나가고 있다. 내가 너를 지나치게 심하게 다룬 것에 대해 많이 울었단다. 주말에 내려오너라. 아들아, 보고 싶다. 사랑한다.” 저는 전화 통화를 끝내고 승용차를 운전하면서 귀가하는 길에 승용차 안에서 목 놓아 울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부르며 혹시 아들의 심령에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 상처를 치유해주시길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토요일에 아들이 집에 내려왔습니다. 저는 주일 오후에 아들 방에 들어가 아들과 단둘이 마주앉았습니다. 아들에게 정식으로 용서를 구했습니다. “000, 그 동안 아빠한테서 상처를 많이 받았지? 내가 이제부터 더 좋은 아빠가 되고 싶단다.”“아니요. 저는 이제 괜찮아요. 아빠가 좋은데요. 아빠를 사랑해요.”온 가족을 모두 식탁으로 불러내고 둘러앉게 한 다음, 이제부터 제가 큰아들을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하기로 작정했다고 선포했습니다. “큰아들 000의 사랑스런 20가지 이유”를 조목조목 읽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큰아들에게 “오늘 너와 진실한 화해를 하고 싶다”고 말하고, 응접실 바닥에 앉아 큰아들을 불러 제 품에 안기도록 했습니다. 저는 장성한 아들을 간난아이처럼 품에 안았습니다. 아들의 마음속에 남아 있을 상처가 치유되길 위해 하나님께 눈물로 기도하였습니다. 제 아내도 옆에서 함께 기도했습니다. 큰아들을 그렇게 가슴 절절히 사랑스럽게 느껴보기는 처음인 것 같았습니다. 22살 큰아들은 간난아이처럼 조용히 제 품에 안겨 저의 축복기도를 받았습니다. 그날 밤, 오랜만에 온 가족이 함께 가정예배를 드렸습니다. 밤 9시44분 새마을호 열차를 타러 가는 큰아들을 서대전역 대합실에서 꼭 껴안고, “000, 아빠가 널 사랑한다. 건강해라.”하면서 환송인사를 나눴습니다. “아빠도 건강하세요.”아들은 씨익 웃으면서 저를 바라보고는 개찰구로 향했습니다. 걸음걸이가 씩씩했습니다. “주님, 제가 아버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