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밭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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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해인님의 시
작성자 조송제 작성일 04/09/20 (07:44) 조회수 3195

- 수녀 이해인 님 "외딴 마을의 빈집이 되고 싶다" 중에서- 오랜만에 연필을 깎으며 행복했다 풋과일처럼 설익은 나이에 수녀원에 와서 채 익기도 전에 깎을 것은 많아 힘이 들었지 이기심 자존심 욕심 너무 억지로 깎으려다 때로는 내가 통째로 없어진 것 같았다 내가 누구인지 잘 몰라 대책 없는 눈물도 많이 흘렸다 중년의 나이가 된 지금 아직도 내게 불필요한 것들을 다는 깎아내지 못했지만 나는 그런대로 청빈하다고 자유롭다고 여유를 지니며 곧잘 웃는다 나의 남은 날들을 조금씩 깎아 내리는 세월의 칼에 아픔을 느끼면서도 행복한 오늘 나 스스로 한 자루의 연필로 조용하고 자연스럽게 깎이면서 사는 지금 나는 웬일인지 쓸쓸해도 즐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