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밭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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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쌀 한 됫박에 슬피 우시던 엄니...
작성자 임영택 작성일 03/06/29 (22:07) 조회수 5074

사랑하는 성도님들께!! 할렐루야!! 안녕하세요? 오늘 밤 예배후에 한 성도님들로부터 요즘 어떻게 지내시냐는? 따뜻한 사랑과 격려를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요즘 게시판에서 이름을 보신지가 오래됐다고 하시면서... 항상 사랑으로 격려해 주시는 귀하신 분들이십니다. 그 답변으로 오래만에  글을 올립니다. 아래 글은 제가 자주 들르는 두란노아버지학교 홈페이지에 게시된 글입니다. 두란노아버지학교는 아버지학교를 수료하신 분들이 간증을 하시는 프로그램이 있는데 서부경남아버지학교에서 간증하신 내용입니다. 혹시 출력해서 보실 분들을 위해서 파일을 첨부하였습니다. 참고로, 대전에서도 대전아버지학교(www.dadschool.org)가 개설되고 있는데 세부사항은 제게 연락을 주시면 기쁨으로 성실히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여러 사랑하는 성도님들 더욱 더 행복하시고... 항상 많이 웃으시고.. 꿈꾸는 삶을 사시길... 감사합니다. 샬롬!! 아버지께 아름답게 쓰임받기를 꿈꾸며... 6.29 주일밤에 한밭제일교회  임영택집사 드림      (016-213-1224)   graceytlim@hanmail.net ------------------------------------------------------------ 자료출처 : 아버지학교 홈페이지 자유게시판(www.father,or,kr) 작성일 :  2003-06-28 오후 12:20:15     서부경남1기 첫 주차 000형제님 간증문 저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으로서 서부 경남 1기 아버지학교를 수료하고, 지금은 거창 참사랑교회에서 예수님을 믿으며 교회를 섬기고 있는 000입니다. 저의 아픈 개인적인 과거와 우리 가정의 슬픈 과거를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말한다는 것이 부끄럽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지만 나의 이 간증으로 인해 지원한 여러분의 가정과 개인에 조금의 보탬이 될까 회개하는 마음으로 읽습니다. 사실 이 아버지학교와 주님을 알기 전 저에게 “아버지”라는 이름은 증오와 원망의 대상이었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할아버지로부터 상당한 유산을 물려받은 집안의 장남으로서 슬하에 5남 2여를 두었습니다. 남부럽지 않았던 우리 집은 아버지의 바람기와 술, 그리고 도박으로 가산이 탕진되기 시작하였습니다. 당시의 한량들이 그랬던 것처럼 아버지는 전혀 가정은 돌보지 않은 채 첩까지 두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가정은 하루도 편안할 날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아버지는 언제부터인지 두어 달에 한번 정도 집에 들어오셨습니다. 오시는 날 우리 집은 공포분위기였습니다. 마지막 결론은 언제나 아버지의 폭력으로 끝이 났습니다. 아픈 추억 중에 한 아픈 추억이 생각납니다. 초등학교를 들어가기 전 어느 날 장대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여름날이었습니다. 아무런 대책도 없는 우리 식구들을 아버지는 힘으로 내쫓고는 첩과 첩의 자녀들을 데리고 들어왔습니다. 폭력과 완력에 내몰린 어머니와 우리 5남 2녀의 형제들은 리어카 하나에 약간의 가재도구를 싣고 정든 집을 떠나 밤거리를 헤매게 되었습니다. 일곱 살 정도였던 저는 지금도 그때의 그 비정한 아버지의 눈빛과 행동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버려진 우릴 부둥켜안고 대성통곡하시던 어머니의 눈물 흘리는 모습 또한 저는 잊혀지지가 않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우린 거창 극장을 운영하시던 작은 아버지 댁의 행랑채에서 더부살이를 하게 되었습니다. 더부살이의 고통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입니다. 어머니는 어린 우릴 굶기지 않으려고 한번도 해보지 않은 식모살이도 했으며 새우젓 장사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온갖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음으로 우리 가정의 삶은 정말 암울하기 거지 없는 날들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저의 유년시절의 아버지에 대한 아름다운 추억은 하나도 없으며 증오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때 저에게 가장 부러웠던 것은 아버지와 함께 손잡고 나들이 가는 친구들의 모습이었으며 동무들이 가지고 있던 필통과 노트를 가지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어린 아들과 어머니의 고통은 아랑곳없이 아버지는 남은 재산을 정리하고 둘째 아내와 그 자녀를 데리고 다른 곳으로 떠났으므로 미움의 아버지는 우리들의 기억 속에 조용히 잊혀져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는 첩으로부터도 버림받고 너무나 초라한 모습으로 우리들 곁으로 왔습니다. 우리 또한 그 시절 입에 풀칠이나 하며 초가집에서 겨우 연명하고 있는 터라 아버지의 중풍으로 병든 몸은 우릴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한 아버지를 어머니는 그래도 우리들의 아버지고, 남편이라고 받아들였으며 우리는 어머니의 매일 날품으로 하루하루를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자연히 아버지의 병간호는 막내인 저가 하게 되었습니다.  그 해 여름의 지루한 장마는 어머니의 날품도 할 수 없게 하였으므로 우린 몇 끼를 굶게 되었습니다. 자식들이 허기에 지쳐 있는 것이 자기의 잘못이라는 것을 깨달았는지 아버지는 병든 몸을 이끌고 어디론가 나가시더니 보리쌀 한 되박을 가져오셨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보리쌀 한 되박은 구걸한 것이었습니다. 어머니는 그 보리쌀로 밥을 지어 우리에게 먹이시며 하염없는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때 저는 그 울음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몰랐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머니의 회한의 눈물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증오스러웠던 아버지는 그 해 겨울을 넘기시지 못하고 초라하게 우리들 곁을 떠났습니다. 어머니는 저에게 평소 아버지가 신던 때묻은 고무신을 씻어오라고 주셨습니다. 저는 미운 아버지의 흰 고무신을 얼음을 깨어 손을 호호 불며 진저리치는 아픔을 씻었습니다. 어머니는 내가 씻어온 그 고무신을 아버지의 관속에 담아 넣었고, 시신은 초라하게 지게에 얹어져 공동묘지로 떠났습니다. 한 아버지의 책임 없는 삶의 종착점은 너무나 비참했습니다. 그 후 저는 중학교를 합격했지만 등록금이 없어 진학을 할 수 없었으며 나 또한 세상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으로 삼류인생으로 살았습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저는 가정을 돌보기 위해 양화점 견습공으로 취직을 하였습니다. 10년이 지나 제법 기술이 있어 양화점을 열었지만, 그때부터 공장에서 기성화가 나오기 시작하여 가게는 빚만 지고 문을 닫게 되었습니다. 난 그 여파로 일에 대한 의욕도 잃은 채 3년 동안 방황의 세월을 보내던 어느 날 저를 무척 사랑해주셨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어머님의 죽음은 잠시 저를 뉘우치게 하여 세상을 다시 열심히 살아보게 하였습니다. 그때 제 나이 30세. 주위의 친구들이 결혼을 할 나이에 나는 중국집 주방의 보조로 취직을 하여 요리를 배웠습니다. 열심히 요리를 배우던 중 한 친구의 도움으로 자그마한 만두가게를 열게 되었습니다. 다행이도 그 만두가게는 장사가 잘되어 혼자 힘으로는 꾸려나가기 힘들 정도로 번창하였습니다. 그때 우연히 지금의 아내를 만났고 저의 필요에 의해 동거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때의 저의 아내에 대한 마음은 단지 바쁜 가게에 일손을 거들어주는 대상으로 생각하였지. 인생의 동반자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2년이 흘러 약간의 정이 들어 우리는 결혼식을 올렸지만 아내에 대한 진실한 사랑의 감정과 영혼의 살 떨림 같은 것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가정은 웃음이라곤 없었습니다. 혼인 후 아내는 아이를 갖고 싶어했지만 저는 지난 날 무책임한 아버지로 인한 상처 때문인지 자식은 짐일 뿐이라며 아이 갖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러나 아내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결혼을 한지 10년이 지나 우린 우여곡절 끝에 첫 아이를 가졌습니다. 그리고 바로 둘째 아들도 낳았습니다. 가정의 화목을 위해 자녀를 낳았지만,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진 가정은 행복과는 거리가 먼 생활의 연속이었습니다. 두 아들을 낳은 후부터 아내는 웬일인지 대순진리회 그리고 여호와의 증인 같은 이단의 종교에 빠져 가정을 등한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때까지 저는 저에게 잘못이 있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고 아내의 이상한 행동들이 밉기만 했습니다. 저는 아내를 이해할 수 없었으므로 자주 부부 싸움을 하였습니다. 부부 싸움을 할 때면 나는 지난날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한 것처럼 폭력을 사용했으며 아내 또한 악으로 나에게 맞대응 하였으므로 저희 가정은 하루도 평안할 날이 없었습니다. 그러기를 육년 가까이 하다보니 정말 열심히 일했지만 가정의 재정은 어려워졌고, 잘되던 가게도 쇠락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럴수록 우리 가정의 싸움은 더욱 잦아져 하루도 바람 잘 날이 없었습니다. 저는 매일 이 과정을 만들어내는 아내를 원망하였고, 아내는 이 모든 것의 시발점이 나라고 생각했기에 우린 서로를 원수 대하듯이 하였습니다. 아내는 저를 무시하였고, 나 또한 아내를 무시하였습니다. 정말 우리 가정은 파탄 일보직전의 금간 유리잔과 같았습니다. 그러한 저에게 평소 가깝게 지내던 앞집의 형제님께서 아버지학교를 소개하였습니다. 저는 그곳이 무엇을 하는 곳인지도 몰랐으며 평소 아내의 이상한 믿음에 대한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기에 냉담했지만 그 형제님께서는 계속 아버지학교를 소개하며 나에게 입학을 해볼 것을 권했습니다. 마저 못해 등록을 하였고, 소가 도살장에 끌려가듯이 참석한 나는 새로운 세계를 알게 되었습니다. 나와 같은 처지를 가진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고, 나를 진정 사랑해주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우연히 참석한 나에게 작은 기적이 일어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첫째 주, 아버지의 영향력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우리 조원들과 대화를 나눌 때에 저는 과거의 기억을 거슬러 올라 갈 수 있었습니다. 잊혀졌던 과거 잊고만 싶었던 유년의 기억,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증오가 저의 일생을 고난으로 담보 지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깨어져 가는 우리 가정의 원인은 아내의 탓도 아니며 오로지 제 탓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행여 아버지와 같이 닮아 가는 것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으로 결혼하기를 주저하였고 아비 됨이 자신 없어 자식 두기를 거부하셨던 나의 모습, 사랑의 마음이 소멸된 채로 한 여자의 남편으로 20년을 살아온 저의 위선과 기만의 모습에 눈물 흘렸습니다. 아내의 불손한 행동이 오만한 언어의 폭언이 아내의 교양 없음 때문이 아니라 저의 무책임과 저의 외면으로부터 기인되었음을 아버지 학교를 통해 깨달았을 때 저는 제 인생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습니다. 모든 것이 상대방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할 때 가정은 정말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저는 아버지학교를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모든 문제가 나에게 있다고 생각할 때 가정은 화목해지고  부부사이는 아름다운 동반자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제 아버지에 대한 아픈 추억으로부터 벗어나려고 노력하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보리쌀 한 됫박에 슬피 우시던 어머니의 모습과 죽은 아버지의 때묻은 고무신을 자식의 손으로 씻어 관속에 넣어 보내야만 했던 어머니의 마음을 생각하며 저는 저의 아버지를 용서하려고 합니다. 나의 아내에게도 나의 두 아들에게도 사랑 많은 남편, 편안하고 친구 되는 아버지가 되기 위하여 노력하고 또 기도합니다. 아직은 제 아버지의 행동처럼 이기적이고 독선적인 모습이 나에게 많이 남아 있는 것도 압니다. 이제부터는 아버지학교에서 배운 대로 나의 잘못을 먼저 생각하며 “ 내탓이오”를 되뇌며 고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저의 이러한 변화에 아내도 자신을 반성하며 노력하는 모습이 너무 사랑스럽습니다. 그리고 매일 매일 “내 탓이오”삶이 진실 될수록 세상을 보는 눈이 가정을 사랑하는 마음이 점점 확대됨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아버지학교를 통해 예수님을 만났으며 그분으로 인해 진정한 용서를 알았고, 그분으로 인해 어떤 것이 죄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아직 모든 것이 부족하지만 저는 하나하나 배워가며 진정한 아버지 진정한 남편이 되려고 합니다 .아버지가 살아야 가정이 산다는 것을 알게 한 아버지학교의 모든 분과 하나님께 감사 드리며 두서 없는 글을 마칠까 합니다. 아버지! 당신을 주님의 이름으로 용서합니다. 주님! 제가 아버지입니다. 윤성광 : 형제님의 글을 읽으니 눈물이 나는군요. 주님을 만난 것이 형제님의 삶속에 가장 행복한 순간임을 깨닫습니다. 형제님 힘내십시오. 사랑합니다.  06-28   김영희 : 앞으로가 중요합니다 저의남편도 그랬습니다 주님 영접을 축하합니다 초 신자인 저의남편 아버지학교 중독자 되어 열심히 섬깁니다 형제님 화이팅  06-28   양은주 : 형제님의 가정에 늘 주님의 손길이 함께 하시길 기도 드립니다. 웃음이 끊이지 않는 가정이 되시길 바랍니다.  06-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