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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삭과 이스마엘의 화해를 위한 평화 콘서트:예루살렘예수행진2004
작성자 최재혁 작성일 04/01/18 (14:58) 조회수 4669

이삭과 이스마엘의 화해를 위한 평화콘서트 1)초대의 글 3000년간의 분쟁과 전쟁,갈등이 종식되고 진정한 평화자로 이 땅에 오신 예수그리스도의 평 화와 사랑이 지구촌 곳곳에 흘러가기를 소망하며 이 평화 콘서트를 전쟁과 분쟁으로 고통하 는 이삭과 이스마엘의 후예들에게 바칩니다. 2)찬양 : 예수전도단 화요모임 찬양팀 , 인터콥 예수행진 찬양팀 3)강사 : 최바울,문희곤,강요한,임이스마엘,김지태,강부현,옥화행 4)포스터 http://www.예루살렘2004.net/etc/peace.asp 동영상 http://www.예루살렘2004.net/etc/jerusalem2004.asp 5)일정 및 장소 1/6(화) 서울 여의도순복음교회 제2성전(강남역) 저녁 6시반 (예수전도단 화요모임) 1/12(월) 울산 울산교회 저녁 7시 1/13(화) 부산 서면교회 저녁 7시 1/15(목) 마(산)창(원) 창원한빛교회 저녁7시 1/19일(월) 대전 대전한빛교회 저녁 7시 1/26일(월) 광주 광주중아교회 저녁 7시 1/26일(월) 천안 장로교회 저녁 7시 (인터콥 월드미션) 1/27(화) 순천 중앙교회 저녁 7시 1/29(목) 전주 바울교회 저녁 7시 1/31(토) 진주 칠암교회 오후 4시 2/2 (월) 서울 온누리교회 본당 (서빙고) 저녁 7시 2/2 (월) 제주 영락교회 저녁 7시 (인터콥 월드미션) 2/3 화 수원 중앙침례교회 저녁 7시 2/5 목 충주 제일 감리교회 저녁 7시 2/7 토 광양 광양교회 저녁 6시 2/9 월 대구 동신교회 저녁 7시 2/10 화 포항 북부교회 저녁 6시반 (예수전도단 화요모임) 2/10 화 인천 주안장로교회(주안성전) 저녁 7시 2/12 목 경주 경주중앙교회 저녁 7시 2/14 토 구미 구미제일교회 저녁 7시 2/17 화 원주 삼천감리교회 저녁 7시 (예수전도단 화요모임) 2/17 화 군산 성결교회 저녁 7시 (예수전도단 화요모임) 2/24 화 강릉 동해안 순복음교회 저녁 6시반 (예수전도단 화요모임) 3/9 화 목포 복음교회선교관 저녁 6시반 (예수전도단 화요모임) 3/16 화 춘천 충인 성결교회 저녁 6시반 (예수전도단 화요모임) 3/23 화 청주 천신교회 저녁 6시반 (예수전도단 화요모임) 예수전도단(YWAM) 인터콥(INTERCP) 예수원 KIBI(한국이스라엘성경연구소) CMF International 그외 최바울 인터콥(INTERCP)본부장 소아시아선교사(1983-1993년),전문인선교협의회(KAT) 회장 한국기독교NGO네트워크 총무 한동대 지역학,비교문화 교수 ,아세아연합신대,서울대,고려대 강사 교수연합세계선교회 회장 교수연합세계선교회 www.prowm.org -곧 완성^^; 고선미간사 019-9435-1020 2월 6~7일 수련회 양재온누리교회 문희곤 예수전도단 대표 강요한 인터콥 중앙아시아 권역디렉터 서울대 치대,우즈베키스탄선교사(1994~현재) 이경욱 인터콥 중보기도 사역총무 이라크(+열방) 품으신 분 ^ㅡ^ 임이스마엘 인터콥 사역코디네이터/MIT사역팀장 숭실대,이라크 긴급구호사역팀장(2002년) 팔레스타인 단기사역팀장(2003년) 예배인도자 (인터콥서 비전스쿨이란 선교기초훈련을 받아서 제가 아는 분들을 주로 소개했어요 ^^;;) www.예루살렘2004.net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갈 이 거룩한 행진에 구별된 신실한 1000개의 한국교회와 3000명의 거룩 한 성도와 하나님의 군대를 초대합니다. [1] 예루살렘 예수행진 2004-마지막 영적전쟁 최바울선교사/인터콥 본부장 9.11 사태이후 세계 영적 기상도는 급변하고 있다. 세계적 제국 미국에 대한 무슬림 전사들의 도 전은 하나의 단순 테러로 해석하기에는 그 파장이 너무 크고 깊다. 빈 라덴과 그 친구들의 대범 함도 가히 놀라운 일이지만 그들의 무력 도발로 인해 국제 관계의 틀과 국제관계 규범이 근본적 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이 또한 주목되는 일이다. 이러한 사실을 두고 혹자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소련이 붕괴된 이후 미국은 유일 초강국으 로 등장하게 된다. 미국 단일 지배의 안정체제가 구축되면서 “상대 적”이 없어지자 이것이 오히 려 세계적 헤게모니 구축을 기도하는 미국에게 불리하게 작용하게 된다. 미국은 무력 개입과 강 제의 명분을 잃어 버림으로써 곤경에 빠지게 되었는데, 마침 9.11사태가 발발하자 이를 호재로 삼아 국제적 테러를 척결한다는 명분으로 “새로운 전쟁(New War)”을 통해 다시 군사적 헤게모 니를 구축하는 계기로 삼고 있다는 것이다. 9.11사태는 군사력으로 패권을 추구하는 미국으로서 는 횡재라는 것이다. 그래서 미국은 이라크, 이란, 북한을 " 악의 축"으로 지목하고 “상대 적”을 가시화함으로써 구도 의 고착화를 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이 사실이라면 미국은 이라크, 이란, 북한 세 나라 모두가 완전히 미국에 굴복함으로 “상대 적”이 완전 소멸하는 것을 원치 않을 수도 있다. 아니 면 이슬람 무장 테러 단체들의 완전 소멸을 원치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아무튼,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과 가치판단에 따라 이렇게 대응하기도 하고 저렇게 반응하기도 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인생들은 미시적으로 자기의 수준에서 다양하게 행동하고 반응하지 만 거시적 및 장기적으로 보면 결국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 지며 주님의 예언이 성취되어 간다 는 것이다. 우리 속담에 뛰어야 벼룩이라는 말이 있다. 인생들은 하나님의 경륜과 역사 앞에 뛰 는 벼룩일 뿐이다. 결국 모든 것이 주님의 뜻에 따라 이루어 지게 되어 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결과를 알고 경기를 하는 사람들이다. 싱거운 경기가 될 수도 있으나 한 편으로는 과정에서 인생들이 이렇게 저렇게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가기도 하고 좌충우돌하기 도 하고, 조금만 더 가면 승리인데 갑자기 바로 직전 앞에서 뒤돌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인생의 한계"를 절감하기도 한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는 인생들의 작태와 어리석음이야 어찌 이 루 다 말 할 수 있으랴! 9.11 사태로 인류공동체는 마지막의 서막을 맞이하고 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가정에서 시작된 이삭과 이스마엘의 형제 갈등이 바야흐로 지구적 갈등으로 팽창한 것이다. 이는 기원전 2천년 이전에 시작된 형제 갈등, 즉 저주의 역사의 지구적 팽창이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아브라함의 가정에서 시작된 축복의 역사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아브라 함을 부르신 하나님께서 "너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이 복을 받으리라"라고 말씀하셨는데, 드디 어 지금 세계는 예루살렘, 유럽, 아프리카, 남미, 북미, 한국, 중국이 복음화 되고, 중앙아시아 실크로드를 따라 예루살렘으로 급속히 복음이 전해지고 있다. 이미 서아시아와 중앙아시아 전 역에 놀라운 속도로 복음이 전파되고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축복의 역사도 마지막 단계에 접 어 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89년 제2차 로잔대회에서 본격적인 세계선교 운동이 지구적으로 시작된 이래 지난 10여년 동 안 3천개 가량의 종족과 민족에 복음이 증거되었다. 이는 과거 2백 여년의 역사 속에서 일어난 복음화 속도와 거의 같은 것으로 세계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속도로 종말을 향해 달리고 있 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앞으로 남아 있는 8천여 개의 미전도 종족 - 대부분 10/40창 즉 중앙아시 아 및 중동 그리고 그 주변에 집중 - 에 대한 선교는 어쩌면 우리 세대에 성취될 수 있을지도 모 른다. 모든 민족에 복음이 증거되어야 하리니 그 때에 끝이 오리라고 말씀하신 주님의 언약의 말씀을 우리는 가까이서 체감하고 있는 것이다. 세계성경번역선교회(WBT)의 통계에서도 2025년이면 모든 성경 번역이 완료될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 앞으로 남아 있는 종족언어 집단이 대 부분 이중언어 집단이기 때문에 복음증거라는 차원에서는 이미 그들 원주민이 읽을 수 있는 성 경이 손에 있다고 볼수 있다. 따라서 오순절 성령께서 모든 족속의 언어로 복음을 증거하신 이 래 지난 2천년 동안 성경이 계속 번역되어 지금 드디어 임무종료 상황을 맞이한다는 것이다. 이제 복음은 예루살렘을 향해 마지막 행진을 하고 있다. 로마서 9-11장을 통해서 우리는 유대인 의 남는 자와 이방인의 남는 자가 구원 얻을 때 주께서 재림하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모든 유대인이 아니요, 모든 이방인이 아니다. 주께서 예정하신 남는 자들에게 복음이 증거될 것이 고 그들은 주님을 영접할 것이다.(사4:11-16-?).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유대인의 남는 자들 이 주께 돌아오는 것과 이방인의 남는 자들의 충만한 수가 주께 돌아오는 것이 동시대에 "완 성"된다는 사실이다. (롬11:2-5. 사49:5-6). 따라서 우리는 이제 마지막 변방을 향해 달리면서 이 마지막 시대에 이스라엘을 생각지 않을 수 없다. 때가 찬 것이다. 그 증거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몇 가지 예를 들면, 우선 예루살렘으로 복귀하는 흩어진 유대인들을 들수 있다. 때가 이르면 -마지막 때에- 흩어진 유대인들이 고토로 돌아올 것을 예언 하셨는데, 우리가 다 아는 것처럼 유대인들이 1948년 고토에서 국가를 건설하였다. (렘16장, 겔 36장, 겔38장). 여기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100여년 전까지만 해도 아무도 이스라엘 국가 건설에 대 한 예언적 말씀을 주목하지 않았었다는 것이다. 지금부터 120여년 전에 유대인 복귀운동이 몇 몇 소수 유대인 지도자들에 의해 시작될 때만 해도 극히 소수의 기독교인들이 이것을 예언의 말 씀과 관련하여 주목했으나 세계교회는 그들의 주장에 별로 귀를 기울이지 않았었다. 그러다가 1948년에 팔레스타인에 이스라엘 국가가 건설되자 그 때서야 예언서를 연구하는 여러 신학자들 과 목회자들이 놀라며 세계교회에 이 역사적 사건의 의미가 상기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세계는 미소 냉전 체제로 곤두박질하고 한국전, 베트남 전쟁으로 이어지는 이데올로기 대립 속에서 중 동에서 가열되고 있는 이삭과 이스마엘의 갈등과 팽창에 대해 예의주시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소련이 해체된 이후 예언의 성취는 그 속도가 매우 빨라졌다. 북방에서 유대인들이 예루 살렘으로 복귀하였다. 특히 러시아 내 유대인들이 이스라엘로 이주하는 바람에 지금 이스라엘 국가 인구의 거의 1/3이 러시아계 유대인으로 구성되어 있다. 현재 이스라엘 국가는 2차 대전 이전에 유럽에서 이주해온 유대인들과 이후 북부 아프리카에서 이주해온 사람들 그리고 소련 해체 이후 러시아에서 이주해온 유대인들 사이에 3각 구도를 형성하고 그룹 간 갈등 양상까지 표출되고 있을 정도이다. 또 한가지 주목할 것은 70년대 중반에 캠프 데이비드 협정으로 미국의 중재에 의해서 이스라엘 과 이집트가 공식적으로 적대관계를 청산한 이후 아직까지도 공식적으로는 이러한 관계를 지속 하고 있다는 것이다. 구약 예언서에는 말세에 이스라엘과 애굽(이집트) 그리고 앗수르(이라크) 가 상호 연결된 "대로"를 통해 교통하며 화해할 것을 예언하고 있다. (사11:10-16. 사19:21-25). 앞으로 이라크 상황 전개가 단기적으로는 다소 역동할지 모르나 결국 이러한 방향으로 움직일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전쟁을 통해서만 평화가 이루어 진다고 주장한다. 평화를 위한 전쟁의 논리는 지 난 인류의 역사 속에서 계속되었다. 덕분에 지구촌은 전쟁이 끝이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는 이스라엘과 애굽과 앗수르의 관계회복과 예루살렘의 평화, 즉 이삭과 이스마엘의 평화를 무 장한 십자군 전쟁을 통해서 이루시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실 것인가? 섬김과 희생과 기도를 통해서 이루실 것이며, 영적 전쟁을 통해서 성취하실 것이다. 또 한가지 중요한 사실은 마지막 때에 예루살렘으로 몰려올 시님의 군대에 관한 예언의 말씀이 다. 대로를 따라 시님 군대가 예루살렘을 향애 몰려올 것이라는 것이다. 시님은 곧 중국을 말한 다.(사49:11-13). 지금 중국 교회는 세계 최대의 기독교인이 있다. 1억 2천만에 달하는 중국 기독교인들은 성경말 씀에 절대 권위를 두는 복음주의라는 측면에서 보면 미국의 5배 가량 된다. 지금 중국 교회지도 자들은 2008년 북경 올림픽 이후 향후 20년 내에 1백만 선교사를 파송하기 위해 기도하며 준비 하고 있다. 중국 교회 지도자들이 이 프로젝트를 Back to Jerusalem(예루살렘으로 돌아가자!) 으로 명명하고 거룩한 1백만 대군의 거병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9.11 사태 이후 서구인들이 예수 이름으로 세계를 경영하던 시절은 공식적으로 막을 내렸다. 세 계 57개 이슬람국가 청년 무슬림들은 반서구 반기독교 국제적 네트워크를 결성하고 무언의 연 대를 하고 있다. 백인 형제들이 들어가서 사역할 수 있는 미전도 종족 및 국가는 거의 없다. 9.11 사태 이후 글로벌 크리스챤 리더십은 한국교회로 넘어 왔다. 한국교회가 역사적, 시대적 사 명을 감당해야 한다. 어쩌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중국교회를 통해 순식간에 이루실 마지막 전쟁 의 첨병이 될 지도 모른다. 마지막 주의 위대한 역사 앞에 세례요한의 역할을 감당할지도 모른 다. 우리는 실크로드를 따라 중국과 예루살렘을 잇는 대로 위에 놓인 마지막 변방의 도성들을 공략하며 동시에 예루살렘을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영광된 사도의 임무를 부여 받았다. 사도들 이 앞서서 행진할 때 하나님께서는 구름 떼같은 허다한 무리를 통해 마지막 과업을 성취하실 것 이다. 선봉에 서서 적진을 뚫고 개척의 역사를 감당한다는 점에서 우리들은 사도이다. 신사도행 전은 우리 한국교회를 통해 다시 불타오를 것이다. 눅19장에서 주님은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면서 눈물로 통곡하셨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네 가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이후로 지난 2천년 동안 예루살렘은 평화와는 전혀 거리가 먼 도시로 남아 있다. 그것도 하나님을 믿는 3대 종교,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즉 아브라함의 후손들 사이에 지난 2천년 동안 전쟁이 끝이지 않았던 곳이 예루살렘이다. 지난 2천년의 통한, 그것은 바로 주님의 그 눈물의 통한이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질문해야 한다. 첫째, 지난 2천년 동안 누가 주님의 재림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열방을 품고 기도하며 나갔던 가? 둘째, 지난 2천년 동안 누가 예루살렘의 평화를 위해 기도했는가? 주님의 꿈과 비전이 있다. 그것은 열방이 주께 돌아오는 것, 그리고 예루살렘이 회복되며 유대 인의 남는 자들의 충만한 수가 주께 돌아오는 것. 지금 우리는 이 역사의 한복판에 서 있다. 이 시대는 마지막 시대가 된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로 마지막 변방 The Last Frontier을 향하 게 하시고 동시에 예루살렘을 향하게 하신 것이다. 이삭과 이스마엘은 화해해야 한다. 십자가가 풀 수 없는 저주는 없다. 십자가의 능력은 유대인 이건 헬라인이건 이방인이건, 아니면 야만인이건 모든 민족을 회복시킬 능력이 있다. 이삭과 이스마엘은 회복될 것이다. 이스라엘과 애굽과 앗수르 사이에 대로가 열릴 것이다. 시온 의 대로가 열리고 시님에서 1백만 대군이 행진하여 파도처럼 몰려올 것이다. 우리는 이 대로를 예비하는 주의 사도들이다. 주께서 우리에게 불과 바람으로 다시 한번 임하셔 서 기름부으시고 당신의 역사를 이루어 가게 하실 것이다. 주님의 예언은 성취되어야 한다. 우리는 이미 그 결과를 알고 있다. 하나님의 사역은 이미 성경 을 통해 공개적으로 말씀하신 예언을 성취해 가는 것이다. 곧 예언대로 오신 분이 예언대로 죽 으셨고 예언대로 부활하셨으며 다시 예언대로 오실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의 사 역은 예언을 성취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이다. 우리는 역사를 만들어 가는 사람들이 다. History Makers! 우리의 사역은 예언적 사역Prophetic Mission이 되어야 한다. 이미 말씀 하신 예언의 말씀을 확증하여 선포하고 시대와 역사 앞에 이루어 가는 것이다. 마지막 전쟁은 시작되었다. 총과 칼이 아니고 돈도 아니다. 우리에게는 적을 소멸하는 성령의 검이 있으며, 강한 진을 파하는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의 권세가 있다. 주님, 세상에서 구별된 거룩한 군사 3천을 세우시옵소서. 당신의 거룩한 종들에게 기름 부으시 고 우리 세대에 당신의 과업을 성취하시옵소서. 실크로드가 성령의 불로 바람으로 덮이게 하시 고 시온을 통하는 대로가 열리게 하시옵소서. 이삭과 이스마엘의 화해를 속히 이루시고 예루살 렘의 평화가 수년 내에 이루어지게 하소서. 아멘! 주 예수여! 속히 오시옵소서! [2] 왜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가야 하는가? 고여호수아선교사/Uz족 사역자 들어가는 말 이제 마지막 달을 맞이하는 올 한해 2003년에는 유난히도 아랍과 이스라엘이 신문지상에 많이 거론되었다. 이라크 전쟁으로 인해 이라크와 주변국가들에 대한 전에 없던 관심이 고조되기도 했지만, 그와 동시에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간의 오랜 갈등이 증폭되어 미국이 어렵사리 만들어서 실낱같은 희망을 갖던 소위 로드맵(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간의 최종 평화안을 성취하기 위한 단계적 중재안)은 완전히 휴지조각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한국의 언론과 미디어가 국내 정치의 변화에 모든 관심을 쏟는 동안, 아랍지역의 텔레비전 방송뿐 아니라 전세계 네트워크인 CNN과 BBC 뉴스는 거의 매시간 톱뉴스에 이라크 아니면 이스라엘에 새롭게 벌어지는 전쟁과 자살폭탄 뉴스들로 가득차 있다. 거의 모든 긴급뉴스는 거의 매일 새로 발생하는 폭력과 살인으로 이어지고 있다. 중동에 평화는 불가능한 것인가? 예수님이 탄생하시고 활동하셨으며, 하나님의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의 주요 삶의 무대인 이 지역은 언제까지 계속 폭파와 살인으로 얼룩져야 하는가? 주님은 총탄과 자살폭탄 가운데 오실 수 있을까? 아랍과 팔레스타인의 많은 민족들이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에 이를 희망이 전혀 보이지 않는 가운데 주님은 과연 다시 오실 수 있을 것인가? 그런데 이런 때에 왜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가야 하는가? 전세계 갈등의 진정한 이유 2001년의 아프간 전쟁과 올해의 이라크 전쟁을 통해 전세계의 갈등구도의 판도는 완전히 바뀐 것이 증명되었다. 미소 양국의 냉전구조가 1991년의 구소연방의 붕괴로 무너진 이후 세계적인 갈등 구조는 더 이상 없어진 것처럼 느껴진 짧은 시간이 있었다. 그러나 사실상 우리 모두가 주목하지 못했던 진정한 문제는 그 이후부터 면모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얼핏보면 이것은 기독교국가로 알려진 미국과 지하드를 수행하는 이슬람 세력간의 종교전쟁같이 보일 수 있지만, 그 속을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그 진정한 이유가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그들을 돕는 편과 그들을 대적하는 편 사이의 갈등인 것을 알 수 있다. 미국이 그 전면에 나타나 보이는 것은 그들이 실제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정치 군사적인 힘이 있기 때문이며, 그 역사가 300년이 채 되지 않은 미국이라는 나라가 자신과 역사적으로 아무 접촉점이 없는 이슬람 국가들과 갈등을 겪는 이유는 성경을 고려하지 않으면 알수가 없다. 기독교는 성경을 하나님의 절대적인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진리인 것을 믿는다. 성경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선택한 백성인 것을 증명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할 것을 요구한다. 또한 성경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이스라엘 백성과 예루살렘에 대한 특별한 애정을 알수 있고 그 마음의 고통 한 가운데에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왕인 다윗이 위치하고 있다. 그러므로 다윗은 “내 마음에 합한자”로 여김을 받고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누린 왕이 되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노력하는 진지한 그리스도인은 이스라엘을 위해 기도할 부담을 느끼게 되어있으며, 유대인들을 향한 태도에 주의를 기울이게 되어있다. 그러므로 이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친 이스라엘의 편에 설 수 밖에 없고, 이런 상황에서 자신에게 정치, 군사적인 힘이 있을 경우 그것을 사용해서라도 자신의 친 이스라엘 정서를 표현하려 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특별히 반 이스라엘의 세력이 응징을 당해야만 할 도덕적 정당성이 입증될 때는 더욱 그렇다. 반면 반 이스라엘의 입장을 살펴보면 그들도 나름대로 역사와 이유를 갖고 이스라엘을 증오한다. 역사적으로는 느헤미야의 재건시기등을 고려한다 해도 2000년 이상 팔레스타인 땅은 이스라엘인들의 손에서 떠나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에 의한 예루살렘 멸망을 기준으로 한다면 이보다 500년 이상 더 위로 거슬러 올라간다. 물론 그 동안 유대인들의 집요한 노력으로 제국에 속한 자치 형태로 약간의 정치적 자유를 얻기도 했지만, 2차대전 이후 독립을 선언하고 난 이후 지금까지도 예루살렘을 유대인들 자기들만의 왕국의 수도로 정하거나 완전한 통치를 하지 못하고 있다. 그 오랜 공백기간 동안 자신의 삶의 터전으로 살아왔던 팔레스타인인들에게 20세기 중반에 어느 날 갑자기 들어와서 성경을 들이대며 이곳이 자신들의 땅이라고 무력으로 주장하는(미국과 유럽 등의 “기독교 세력”의 비호 아래) 이스라엘인들은 그들의 눈에 한낱 침입자에 불과한 것이다. 그뿐 아니라 이슬람의 창시자인 마호멧(무함맛)이 천사의 부름을 받아 마법의 말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 예루살렘까지 여행하고 지금의 엘 아크사 사원이 있는 곳에서 승천했다고 믿는 무슬림들에게 이곳은 이슬람의 가장 성스러운 3대 도시 중 하나로 되어 절대 물러설 수 없는 명분을 주고 있다. 어느 누가 2000년 전의 일을 근거로 갑자기 나타나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때 순순히 물러설 것인가? 예루살렘, 베들레헴은 어떤 곳인가? 예루살렘(유대어로는 예루살라임)이라는 이름의 문자적인 의미는 일반적으로 “평화의 터(도시)”로 알려지고 있다. “예루”는 터, 기초, 도시라는 의미이고 “살렘”은 “평화”라는 의미를 갖는다. 이 이름은 아브라함이 멜기데섹을 처음으로 만난 창세기 14장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이곳은 원래 여부스족이 살던 곳으로 비록 여호수아가 이 성을 공격했지만 완전히 정복하지 못하고(수 15:63), 이스라엘의 위대한 왕국을 건설한 다윗의 때에 와서야 처음으로 이스라엘에 점령되고 다윗왕은 여기서 이스라엘의 왕권과 통치를 선포했다(삼하5:7-10). 이 예루살렘은 이때부터 이스라엘민족의 영원한 도성으로 여겨지며, 그 이름이 창세기에서 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성경에 무려 767번이나 나온다. 예루살렘성의 원래 이름이었던 시온성이라는 이름이 167번 나오는 것까지 합하면 성경에 이 도성의 이름은 무려 934번이나 등장한다. 문자적으로든 상징적으로든 하나님께서는 계시적으로 이 도성에 당신의 이름을 두시겠다고 반복적으로 약속하시기 때문에, 그 약속을 받은 유대인들에게 예루살렘은 특별한 신앙의 의미가 있는 영원한 도성인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이 이방인들에게 점령당하거나 통치되는 것을 가장 참을 수 없어한다. 하나님이 다윗과 그의 왕권의 언약관계를 확정할 때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맺은 것과 같이(예루살렘은 다윗성이라 불리웠다) 예수님 또한 다윗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를 드러내셨다. 다윗은 구약에 나타난 예수님의 가장 근접한 그림자 이다. 다윗도 예수님과 같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서 자랐고(눅 4:4, 11; 요7:42), 예수님은 당신의 나라의 왕권을 예루살렘에서 “십자가를 통해서” 선포하셨다. 베들레헴은 예수님과 다윗왕이 이 땅으로 온 곳이고 예루살렘은 그들의 신적통치를 선포한 도시라는 점에서 선택받은 백성들에게 매우 특별한 의미가 있는 도시들이다. 이 시대에 친 이스라엘의 통치 아래 있는 예루살렘과 친 팔레스타인 통치 아래 있는 베들레헴 간을 오가면서 선포하는 우리의 평화의 기도는 예수님의 탄생과 마지막 지상 사역인 십자가 사역의 완성된 연결을 표현하는 예언적 의미가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대안 코리아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친유대적인 미국이나 유럽인이 아니고 그들과 적대관계에 있는 팔레스타인이나 무슬림은 더더욱 아니다. 우리는 한국인이다. 여호수아가 여리고성을 공격하기 위해 접근하면서 잔뜩 긴장하고 있을 때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그 앞에 나타났다. 다급한 상황에 있던 여호수아는 그 앞에 나타난 군대장관이 자신의 편인가 아니면 적군인가 물어본다. 그의 질문에 대하여 하나님은 매우 의미심장한 대답을 하신다. 그가 가로되 아니라 나는 여호와의 군대장관으로 이제 왔느니라 (수 5:14) 어쩌면 하나님은 이 시대에 그 거룩한 땅에서 진정 당신의 편에 설 자들을 찾으시는지 모른다. 어느 누구의 편에도 서지 않는, 오직 하나님의 마음을 대변할 당신의 백성들을 찾으시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 사람들을 사용해서 당신의 평화를 이루시고 싶어할지 모른다. 그것은 지금까지 있어왔던 정치, 외교적인 방법이 아닐지 모른다. 사실 그동안 중동평화에 대한 유럽과 미국의 집요한 노력이 있어왔다. 미국의 대통령이면 누구나 한번쯤 중동평화에 대한 관심과 정치,외교적 노력을 기울이고 그에 대한 일말의 진전을 자신의 임기의 치적으로 생각해 왔다. 또한 많은 강대국 지도자들이 마치 진정한 평화가 온 것처럼 다양한 제스추어와 함께 웃으며 손을 잡고 여러 장의 사진을 찍고 언론에 등장했지만, 실제 사망자 수는 더 늘어났고 서로간에 적대감정은 더 강해졌다. 이쯤 되면 사람들로부터는 더 이상의 희망이 없을 때가 되었다. 어느 편에든 진정한 대안이 필요한 때가 되었다. 정치, 외교적인 해결방안이 아닌 진정한 평화약속이 중재되어야 할 때가 되었다. 완전히 새로운 패라다임의 대안이 하나님쪽에서 마련되어야 할 때에 우리 한국의 교회가 그 부름을 받은 것이다. 정치 외교적인 방법이 아닌 영적인 방법으로. 주님은 한국 교회에 우리가 무엇을 위해 더욱 기도해야 하는지 말씀하고 계신다. 이것은 비장한 특권이다. 우리는 어쩌면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시온성, 예루살렘의 평화를 위한 하나님의 마지막 대안인지도 모른다. 그땅에 진정한 평화가 정착되지 않고서는 중동국가들 간에 편만한 반유대 정서는 가라앉지 않을 것이며, 반 유대 정서가 지속되는 가운데 유대인으로 알려진 예수가 구세주로 인정된 복음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다. 또한 이들이 잃어버려진 백성으로 남아있는 한 예수님의 재림은 요원한 것이다. 이제 마지막 실마리가 보이는 것 같지 않은가? 사실상 많은 현대의 중보자, 예언자들이 미래 어느날 마침내 모든 무슬림들과 민족과 이스라엘민족이 함께 그리스도를 주로 인정하는 날이 올 것이라고 믿음으로 선포하지만 그 근거로 보이는 구체적인 변화의 모습은 아무도 제시하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우리의 영적 수고를 통해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것은 무엇보다 잃어버린 영혼들이 오해를 풀고 예수의 그리스도 되심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팔레스타인인들과 중동의 남은 지역들의 영혼들이 반이스라엘 감정을 풀고 그 충만한 수가 하나님의 나라에 더하여지는 것이다(롬11:25). 그러기 위해서 그들에게 친이스라엘도, 반이스라엘도 아닌 사람들에게 진리의 복음을 들을 기회가 주어져야 할 것이다. 그 이후에 이스라엘도 마침내 그리스도를 인정하는 날이 오고야 말 것이다. 이 일련의 마지막 시대의 기적들이 매우 가까이 온 것이다. 우리의 기대와 각오 주님은 정말 빨리 다시 오고 싶어하시는 것 같다. 우리는 그 길을 준비하는 일에 부름을 받았다. 그 부르심과 함께 우리는 기대한다. 우리가 방문하고 기도한 그 땅 예루살렘에 새로운 평화의 전기가 마련되고, 그 해 2004년 한국인들이 다녀간 베들레헴에 평화가 선포된 것이 말씀 그대로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라는 말씀이 성취되기를 믿음으로 기대해야 한다. 올 성탄절에는 다른 의미로 누가복음 2장을 읽어야 한다. 우리의 2004년 예루살렘 방문길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눅 2: 10)”이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그냥 쉽게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이것을 더 깊이 알면 알수록 우리의 적은 더 기승을 부릴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전 세계를 갈등과 죽음으로 몰아가던 사단의 궤계가 더욱 밝히 드러나는 것을 사단도 좌시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정말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우리의 각오는 사도바울의 각오여야한다. 바울은 서둘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서 이렇게 고백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행 20:24) 우리의 달려갈 길(예루살렘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교회개척의 사명), 이 두가지를 위해 우리는 목숨을 버릴 각오를 새롭게 해야한다. 밑에 글들은 제가 더한 것입니다 평화콘서트와 직접적관련은 없습니다 ============================================================= [3] 이라크 평화를 위한 기독인 연대 (이라크 파병문제와 고통받는 이라크인을 위한 기도회) 기도회 일정 및 진행 프로그램 ▷ 일시 : 2003년 11월 20일 오후 7시 ▷ 장소 : 서울영동교회 교육관 ▷ 참여단체 : 공의정치실천연대, 교회개혁실천연대, 기독변호사회 기윤실, 뉴스앤조이, 분당두 레교회 청년회, 새벽이슬, 성경적토지 정의를위한모임, 수원성교회 사회선교위원회, 인터콥, IVF사회부 복음과상황, 통일마당. ◉ 1부 증언과 강의 : 진행 - 구교형 목사(분당두레교회) - 찬양 - 현지상황 증언 : 한재광 부장 - 지구촌 나눔 운동 사업부장 - 특별강의 : 이문식 목사(남서울산본교회, 공정연대 중앙위원) 전쟁과 폭력, 이라크 전쟁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 2부 논의와 기도회 : 진행 - 이진오 국장(공정연대) - 실천방향 논의 : 이라크 파병문제에 어떤 행동을 하며, 어떻게 고통받는 이라크 인들 도울 것인가를 논의. - 기도회 : 진정한 평화와 인권 정신에 따라 전투병 파병을 반대한다. 기도회 참여단체 공동 성명서 초안 우리 기독교 단체는 정부가 이라크 파병원칙을 밝힌 이후 일부 각료을 중심으로 전투병 파병을 기정 사실화하며 여론을 몰아가는 것에 대해 심히 우려하며 우리의 입장을 밝힌다. 우리는 진정한 평화정신과 인권보호인 이웃사랑을 실현한 예수그리스도의 정신에 따라 불의한 이라크 전쟁에 대한 한국군 파병을 원칙적으로 반대한다. 이는 남의 나라 문제에 우리가 희생 할 필요가 없다는 이기적인 판단에서가 아니라 미국의 이라크에 대한 전쟁이 명분과 의미를 상 실한 불의한 침략전쟁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전 세계 모든 독재자 및 인권 탄압국들에 대해 전 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할 권한을 미국에 부여한 바가 없음을 확인한다. 또한 미국이 내세우는 독재자 후세인 축출의 명분은 이전 시기 후세인이나 빈라덴을 후원해 성장시킨 것은 미국 자신 이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전투병 파병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국익과 북핵문제 해결, 한미동맹관계 강화를 내세운다. 그러 나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들의 희생을 담보로 이익을 얻는 것은 그것이 개인이든 국가이든 기독 인이 따를 정신이 아니다. 북핵문제 해결은 이라크 파병의 전제조건이 될 수 없으며 진정한 한 미동맹관계 강화는 불의한 전쟁을 지지하는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세계평화를 위해 공동으로 기여하는 것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더구나 제시되는 국익에 대한 주장이 구체적 근거도 가지 고 있지 않으며 단지 동맹국가라고 믿고 있는 미국의 보복으로 인한 두려움에 근거하고 있다면 이는 더욱 불의한 일이 될 것이다. 현재도 연일 곟속되고 있는 이라크 국민들에 의한 이라크 점 령 연합군에 대한 공격과 아랍국가들의 엄청난 반발과 적대감을 고려한다면 우리 젊은이들을 단지 미국의 압력을 이유로 불의한 전장에 내보내서는 안된다. 우리민족은 오랜 약자의 섧음을 알고 있다. 우리는 외국군의 침략과 점령 아래서 미래를 빼앗 긴 이라크 국민들의 한숨과 눈물을 고려하지 않는 전투병 파병 주장이 평화와 인권의 정신에 위 배된다는 것을 지적하며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1. 정부는 진정한 평화와 인권의 정신에 따라 전투병을 파병해서는 안된다. 2. 명분과 근거도 없는 국익, 북핵문제 해결, 한미동맹강화를 내세워 전투병 파병을 기정 사실화 하려는 일부 각료, 언론들의 각성을 촉구하며 투명하고 공정한 절차를 통해 결정되기를 촉구한 다. 3. 우리는 미국의 공격적인 패권정책을 반대하며 미국정부의 변화를 강력히 촉구한다. 미국은 국제문제 전반에 대한 패권적 일방주의를 포기하고, 특히 이라크 전후 재건 및 치안유지에 대 한 실질적인 권한을 UN에 이양할 것을 촉구한다. 4. 우리는 공정한 절차와 여론 수렴을 통해 파병이 결정되더라도 진정한 평화와 인권 정신에 입 각한 이라크의 재건과 복구를 지원할 공병, 의료, 통신 등에 집중하는 비전투병 파병이어야 함 을 촉구한다. [4] 전쟁에 대한 성경적 관점과 이라크 파병 이문식 목사/남서울산본교회, 공의정치실천연대 중앙위원 오늘 저는 성경을 바탕으로 전쟁에 대해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를 살펴보고, 논란이 되고 있는 파병에 대해 그리스도인들이 취할 태도를 적용해 보도록 하겠다. 롬16:17-20절에서 사도바울은 분쟁을 일으키는 자 에게서 떠나라고 하며 저들은 자신의 배(이 익)을 섬기고, 우리를 아첨하는 말로 미혹한다고 한다. 19절에서는 선한데 지혜롭고 악한데 미 련 하라고 하며, 평강의 하나님께 사단이 너희 발아래 상하게 하기를 구하였다.. 성경에는 도처에서 전쟁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특히 구약성경은 전쟁에 대한 이야기가 너무 많 아 전쟁에 대한 이해가 정리되지 않으면 성경을 이해하기 어렵다. 현실 세계도 마찬가지다. 1, 2 차 세계대전, 6․25전쟁, 베트남전, 걸프전 등 수많은 전쟁이 있었고 진행 중이다.성경과 현실 에 만연한 전쟁에 대해 어떻게 이해야 하는가? 성전(聖戰, Holly War)은 없다. 가장 먼저 생각할 것은 신약시대 기독인들에게 성전(聖戰)이라는 것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1905년 종교회의에서 교황 우르반 2세는 성전을 선포하며 십자군 전쟁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 는 교회 역사상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하는 신학적, 역사적 오류였다. 신약시대에는 어떤 이유에서도 전쟁을 성전이라는 용어를 통해 미화한 적이 없다. 이를 분명히 해야 한다. 성 전은 신약에서 현실적 전쟁으로 실현된 적도, 될 수도 없었다. 구약성경에도 성전이라는 용어 는 없다. 폴나테라는 구약학자가 성전이라는 용어를 썼으나 대부분 학자는 잘못된 용어라고 지 적한다. 여호수아의 전쟁 등은 성전이 아니라 여호와의 전쟁이라고 한다. 그러면 소위 구약의 성전이라 고 하는 여호와의 전쟁은 무엇인가? 첫째는 내용이 대단히 구속사적이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공동체가 구약시대는 신정정치 형태로 존재하였기 때문에 다른 신을 섬기는 국가형태를 가진 나라와 전쟁이 존재하였다. 그러나 신약시대는 국가가 아닌 교회라는 형태로 존재한다. 교회는 어떤 공권력, 군대, 폭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것만 보아도 신약 교회가 전쟁을 수행할 아무 런 의무가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둘째로 구약의 전쟁은 예수님의 십자가 전쟁으로 완성되 었다고 보아야 한다. 구약의 전쟁은 예배 행위와 밀접하다. 전쟁이 나기전에 모세, 여호수아, 기 드온 등 전쟁 선지자들이 불림을 받는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을 군사로 모집하는데 이때 칼 과 창의 성격이 아닌 신앙적으로 헌신된 자들을 모으는 특징이 있다. 또 전투를 위한 상비군은 존재하지 않았다. 일상생활을 하다가 선지자가 하나님의 뜻으로 모이라고 할 때 신앙적인 이유 로 모인 것이다. 사울의 군주제와 다윗 시대를 지나며 비로서 상비 전투병이 존재한다. 이때 상 비군도 왕실 친위대 형태, 장교 중심, 전사(장수) 중심이지 이스라엘 모든 백성을 군대화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도 군대 숫자를 중시하지 않았다. 헌신도를 중시하였다. 종교적 집단 인 것이다. 셋째 병사들은 3일 이상 정결례를 행하고 성결한 사람이 되어야 했다. 그래야 여호와 께서 임재 하셔서 하나님의 전쟁을 하는 것이다. 전투력을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성결을 요청 한 것이다. 넷째 하나님의 방식으로 전쟁을 수행하지 회의를 통한 전략으로 진행되지 않는다. 전쟁 방식이 제사와 유사하다. 제사장들이 법궤를 메고 나가고 레위인들이 뒤를 따르며 빙빙돈 다. 여호와 하나님의 임재를 기다리고, 그로 말미암아 적들이 무너지는 것을 기다리며 뒤좇아 수습하는 역할을 한다. 출15장에서는 여호와는 전사(장수)이시다 라고 표현한다. 다섯째 하나님 이 임하신 표적이 나타난다. 신적 공포가 적들에게 나타난다. 적들이 전쟁에 대한 의욕을 상실 하게 되는 것이다. 기드온 전쟁에서도, 사울이 전쟁 시 위에서 뽕나무 밟는 소리가 나면 싸우라 고 한 것 등에서 잘 나타난다. 상대방의 마음이 물처럼 녹는 다고 하였다. 고대 전쟁은 심리전이 다. 장수가 누가 나오느냐가 결정적인데 하나님께서 직접 이스라엘의 장수가 되어서 나가시는 것이다. 가끔 택한 받은자 대행하기도 하는데 다윗이 골리앗을 무너트린 경우가 해당한다. 순종 할 때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것이다. 여리고성의 무너짐도 좋은 예이다. 미디암의 군사는 항아 리 깨고 소리지르니 자기들끼리 지리멸렬 한 것이다. 전쟁의 성패는 순종에 달려있다. 여호와는 전쟁의 신이요, 승패는 여호와께 달렸다. 전쟁의 승패는 어떻게 결정되는가? 기준이 무엇인가? 이스라엘 백성은 무조건 승리하는가? 아니다. 고대 신들은 국가신들이다. 전쟁의 승 패의 기준이 예배를 드리기 때문에 무조건 이기는 것이 아니다. 기계적 관계가 아니라 언약적 관계이다. 하나님의 도덕, 법이 있다. 이 언약에 순종하고, 법 계약에 순종할 때 편드는 것이다. 때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이 순종하지 않을 때 여호와의 칼이 이스라엘에 향한다. 아이성 전 쟁 때는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이 녹았다. 바벨론에 끌려가기도 했다. 블렛셋 전쟁 때는 법궤를 끌고가도 졌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지신 것은 아니다. 곤 신이 팔다리가 부러지고 망한 것을 우 리는 잘 알고 있다. 이런 일들로 인해 바벨론 안에서도 전쟁에서 진 이스라엘 신을 우주의 신으 로 인정한다. 여호와는 홀로 싸우신 것이다. 이것이 여호와의 전쟁의 중심이다. 멸절(滅絶)전쟁의 원칙과 평화의 복음 멸절 전쟁이 있다. 모든 것을 죽이는 소위 싹쓸이 전쟁이라 할 수 있다. 김용옥씨는 이런 이유 로 여호와신은 광야의 깡패 신, 잔인한 신이라고 비하하였다. 그러나 모든 전쟁이 멸절 전쟁이 아니며, 멸절 전쟁에는 원칙이 있다. 멸절 전쟁은 첫째 상대방이 돌이킬 수 없는 악에 들어갔을 때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심판을 미리 맛보게 하기 위해 심판적 성격의 전쟁이다. 이때는 남녀노 소, 우양 모두가 사망 아래에 있게 된다. 이 경우에는 저들의 악이 관영 했을 때라는 전제가 있 다. 가나안 전쟁 등이 그런 것이다. 죄악에 대한 심판과 저주의 전쟁인 것이다. 이런 전쟁 때 전 유물을 취하면 오히려 이스라엘에 저주가 임하였다. 멸절 전쟁은 이스라엘에도 임하는 것이다. 면하는 방법은 누군가 대신 죄를 받아야 한다. 전유물을 취한 아간의 멸절로 이스라엘의 멸절 이 면한 것처럼 예수께서 우리 대신 멸절 당하셔서 우리에게 멸절이 임하지 않은 것이다. 우리 를 대신해 대신 멸절 당하는 자가 예수그리스도인 것이다. 예수께서 십자가 달리실 때 쓰인 저 주라는 단어가 바로 구약에서 쓰인 멸절이라는 단어와 동일어이다. 그리스도 이후 멸절은 없 고, 주님이 대신 멸절 받음으로 풀려진 복음이 주님 재림할 때 임하는 것이다. 이 가운데는 화평 의 복음만이 존재하며 이를 전파하기 위해 교회와 공동체가 존재하는 것이다. 구약의 전쟁은 예 수의 십자가 저주로 모두 끝난 것이다. 예수 안에 다시는 해됨, 멸절, 죽음이 없는 것이다. 그럼 으로 기독교 공동체가 성전(聖戰)을 행한다는 것은 엄청난 신학적 오류이다. 함부로 구약을 대 입하면 해석적인 명백한 오류가 생긴다. 신약시대에 어떤 경우의 성전도 없다. 이슬람, 유대교 에는 성전이 있으나 예수교에는 성전의 개념이 없다. 우리에게 남겨진 것은 평화의 복음 전파만 이 남아 있는 것이다. 정의로운 전쟁의 원칙과 의미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기독인인은 두개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 백성으 로 일체의 성전은 없으나 한 국가 시민으로 정당한 전쟁에는 참여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중요한 신학자들이 있을 수 있다는 입장에 있다. 정의로운 전쟁론이라고 하 는데 .어거스틴, 아퀴나스, 루터, 칼빈 등이 이 입장에 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대표적 본문으 로 구약을 인용하지만 이는 위에서 살펴본 대로 정당하지 않다. 칼빈이 ‘기독교 강요’에서 구약 본문을 그대로 인용한 것은 일정한 오류를 범한 것이다. 윤리적으로 사용한 것이다. 그러면 근 거는 어디서 보아야 하는가? 신약에 보면 세례 요한이 군인들에게 회개의 표시로 무기를 버릴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 강포이 행하지 말고 받는 요를 족한 줄 알라고 했다. 군인이나 군대를 중 립적으로 보신 것이다. 다만 사익을 위해 공권력을 폭력으로 전환시켜서는 안된다고 하신다. 우 리나라에서 있었던 군사 구테타가 이에 해당한다. 예수님도 로마 군인에게 그런 요구를 하지 않 았다. 롬 13:1-7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이 칼의 권세를 국가에 주었다고 강변하고 있다. 권세는 authority와 power가 있다. 이 말씀에서 든 power이 하나님께로 났다는 것이 아니라, authority 가 하나님께 온 것이라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주신 권세에 합당한 파워여야 한다는 것이다. 과거 군사정권의 힘이 모두 하나님께로 나왔다고 하며 지지하고, 조찬기도회 등을 열고 한 것들 은 잘못된 것이다. 권선징악을 위해 사용되는 검찰, 경찰, 군대 등의 힘은 합당한 권력이다. 그 러나 합당한 권세를 벗어나 사리사욕을 위해, 권악징선하면 하나님의 권위로부터 나온 권위가 아님으로 저항해야 하는 것이다. 기독교인의 저항권을 천명한 것이 이 본문인 것이다. 이 본문 을 군부독재에 침묵하는 근거로 쓴 것은 잘못된 것이다. 사악한 권력은 하나님의 칼이 아닌 것 이다. 그래서 기독인이 혁명한 것이 청교도 혁명인 것이다. 영국에서는 반란자라고 했으나 이 는 기독교 저항권의 근거에 의한 것이었다. 이는 시민혁명 등의 과정에서 모두 정돈된 내용이 다. 칼의 권세는 하나님께서 국가에 준 것이다. 국가는 일반적인 정의에 어긋나면 안된다. 공권 력이 폭력이 되면 저항해야 하는 것이다. 이는 내부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칼빈은 국제사 회에도 적용시켰다. 국제 사회에서 악을 행하면 그것을 막기 위해, 침략전쟁에 대한 방어전쟁으 로 전쟁을 할 수 있다고 했다. 정의로운 전쟁에는 7가지 전제 조건이 있다. 첫째는 정당한 원인이 있어야 한다. 침략으로부터 방어 전쟁이어야 한다. 북한이 일으킨 6 25전쟁은 북에서는 해방전쟁이라는 의미를 부여하겠지 만 우리나라 입장에서 보면 침공을 당해 무질서를 방어하기 위한 전쟁인 것이다. 둘째 정당한 의도여야 한다. 복수여서는 안된다. 그런데 이라크 전쟁은 복수 요소가 많다. 셋째 마지막 수단 이어야 한다. 외교, 국제 재판, 국제기구 협력 등을 거쳐야 하는데 이라크 전쟁은 이를 생략했 다. 최후의 수단이 아니었다. 넷째 합법적 정당성이 있어야 한다. UN 등의 결의가 있었는가? 이 라크 전쟁은 UN을 무시한 일방적 전쟁인 것이다. 합법적인 것은 UN 주도의 평화군이 가장 합법 적 형태이다. 다섯번째 승리의 가능성이 있어야 한다. 여섯째 제한된 공격이어야 한다. 일곱째 민간인 공격은 배제되어야 한다. 부시는 제한된 공격으로 민간인 공격이 배제될 것이라 장담했 으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이 7가지가 정당한 전쟁론인데 역사상 7가지를 만족시킨 전쟁은 한 번도 없었다. 관념적, 신학적 전쟁론인 것이다. 왜 신학자들은 정당 전쟁의 가능성을 주장했는 가? 전쟁을 억제하기 위해서이다. 이것도, 저것도 안된다고 하며 그럼으로 전쟁하지 말라고 한 것이다. 전쟁을 미화 지지하기 위한 것이 아닌 것이다. 이 자체가 전쟁 억지의 신학적 이론이 다. 기독교인은 핵절대 폐기론자이다. 특별히 제한된 공격과 민간인 배제의 경우, 최근 핵전쟁 등을 보면 핵전쟁은 어떤 것도 정당 전 댕전댕이 될수 없다. 제한된 목표나 민간인 배제가 불가능하다. 그 시대 뿐 아니라 이후에 태어 난 사람, 채소, 물, 동식물 모두 피해자가 된다. 핵억지력을 가짐으로 평화를 유지할 수 있다는 논리는 잘못된 것이다. 핵은 기독교에서는 무조건 반대이다. 평화를 위한 억제력이라는 입장도 틀린 것이다. 동독이 핵을 가졌을 때 서독에 미국의 핵이 들어거려고 했다. 이때 서독 교회가 둘 로 나뉘었다. 전술핵의 필요를 인정하는 보수적 교회가 있었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것이다. 남 한, 북한 모두 잘못된 것이다. 북한도 핵억제력을 주장한다. 기독교인의 입장은 핵평화주의, 핵 절대 폐기론에 서있다. 이라크 파병에 끝까지 반대해 한다. 이라크 전투병 파병은 반대해야 한다. 교회는 국가 이익을 목표로 한 전쟁에 대해 지지, 암묵적 동의를 해서는 안된다. 이기적 속성을 견지해서 하나님의 보편적 정의, 평화의 원칙을 견지할 책임, 선지자적 책임이 교회에 있는 것이다. 국가의 정책이 하나님의 기준에 어긋나면 교회는 이를 비판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이라크 전투병 파병은 절대로 지지하거나 암묵적 동 의해서는 안된다. 거젓선지자가 되는 것이다. 역사상 미국의 청교도들은 지나치게 종교적 강박 관념을 가져서 극단적인 병적 현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그래서 ‘주홍글씨’같은 책이 나온 것이 다. 미국의 지도자들은 전쟁에 대해 신학적으로 정당하게 인정받고 싶은 바리새적인 충동에 휩 싸인다. 부시는 전도, 성경공부 많이 하는 보수적 기독교인이다. 그래서 보수적 교회가 지지한 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좋은 기독인이라고 하는데 문제는 항상 자신들의 정치적 행위도 신학적 정당성을 부여 받으려고 한다는데 있다. 반드시 그럴 필요도 없는데...대표적으로 1913년 윌슨 은 전쟁 담화문에 성경귀절을 담았다. 92년 아버지 부시;는 걸프전 선포를 장대한 기도로 마쳤 다. 우리나라에 기도 많이 하는 장로가 청와대에 들어가면 우리도 그럴 가능성이 높다. 기독교 정당 만든다면 겁난다. 더 망신 당할까 우려된다. 이런 전통이 미국과 비슷한 면이 있다. 다행 히 이번 전쟁에 대해 미국의 기독교가 정당한 전쟁이 아니라고 일축했다. 피너 아네트 기자는 이라크 전쟁과 베트남전과의 공통점을 명분을 애써 말한다. 진실은 호도하며 국민을 속인다고 지적하였다. 베트남 전쟁때 우리나라는 미국의 요청에 따라 의료 공병부대를 시작으로 8년 8개 월 동안 32만여명을 파견해 전사 4천9백여명, 고엽제 환자 1만6천여명, 엄청난 부상자을 남겼 다. 또 한국 이미지가 상당히 나빠졌다. 평화의 민족이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었다. 국익을 방패 로 하는 것은 평화적 민족이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는 국익에 반하는 행위이다. 한번 미국에 끼 워 파병하면 미국이 망할 때까지 모든 전쟁에 개입해야 한다. 이번에 끝내야 한다. 터키 이상으 로 단호하게 해야 한다. 우리 시대의 결단이 중요하다. 우리 시대에 교회의 선지자적 책임이 있 다. 모든 전쟁에 끌려가 젊은이들이 피흘리고, 타민족에 고통을 주게 되는 것에 대한 책임이 있 다. 아니라고 할 일상일대의 기회이다. 그만큼 부당한 전쟁이기 때문이다. 베트남 파병 때는 반 대여론이 있기 어려웠다. 그러나 지금은 시민단체 등 여론이 갈려있다. 이때 끝내야 한다. 우리 가 반대한다고 해서 미국이 우리에게 보복을 가할 것이라고 하지만 사실이 아니다. 동북아 정 치 경제논리는 자국 이익에 따라 이루어진다. 파병한다고 봐주고, 안한다고 안 봐 주는 것이 아 니다. 감상주의이다. 북한과의 관계는 미국 자신의 국익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다. 우리도 우리 계획에 따라 움직여야 한다. 국익 파병론은 현실적이지도 명분도 없다. 정신차리고 반대해야 한 다. 평화유지군이라는 명분이 주어질 때 평화를 위해 제한적으로 보내거나 자국민의 환영이 있 을 때 가야한다. 칼빈은 독재보다 더 무서운 것이 무정부 상태라고 했다. 무정부 상태를 막은 것 이 필요하나. UN의 승인 하에 평화유지군으로 갈 때 공권력이 되고, 그렇지 않은 것은 폭력이 된다. 교회는 지지 동의해서는 안된다. 침묵은 거짓선지자의 반열에 서는 것이다. 한기총의 지 지 행태는 너무 가슴 아픈 일이다. 현재 UN 결의는 다국적군이지 평화군이 아니다. 현재의 명분으로는 어렵다. 의료, 공병 고려할 수 있다. 그러나 베트남전도 의료 공병이 시초였다. 끝까지 반대하는 것이 더 낳다. 반대해도 갈 것 가는데 반대하는 것이 지혜로운 것이다. 하나님의 평화정신으로 선지자적 냉정함을 유지 하며 국가 권력에 대한 감시자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www.예루살렘2004.net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갈 이 거룩한 행진에 구별된 신실한 1000개의 한국교회와 3000명의 거룩 한 성도와 하나님의 군대를 초대합니다. 주님 10만선교사를 일으켜 주옵소서 남미교회와 중국 100만대군을 일으켜주옵소서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